핵심과정 수강 후기
《핵심과정-과학》을 듣고
글ㅣ김기원
《핵심과정-과학》을 수강하는 동안, 나는 얼마 전 교회에서 지방 선교회 행사로 다녀온 창조과학 세미나의 기억을 문득 떠올리게 되었다. 이전에도 비슷한 세미나를 들은 적 있기에 그 세미나가 어떤 분위기와 논조를 띠고 있을지 짐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전도사로 사역하는 입장에서 빠질 명분은 없었기에, 결국 교인들이 타고 있는 작은 승합차에 함께 올라탔다.
출발하기 전, 사무실에서 부목사님이 조심스레 말을 걸어왔다.
“전도사님, 마음 단단히 먹으셔야 해요.”
나는 예감이 좋지 않음을 느끼며 되물었다.
“왜요?”
부목사님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지난 세미나를 들어보니 익룡이랑 티렉스 같은 공룡이 구약시대에도 실존했다고 이야기해요. 성도님들은 거기서 아멘을 외치고요.”
그 말을 듣는 순간, 마음에 불편함이 밀려들었다. 나는 짧게 “쉽지 않네요.”라고 답했지만, 이미 출발한 승합차같이 좀처럼 가라앉은 마음을 쉽게 추스르지 못했다.
차 안은 늦은 오후 특유의 나른한 공기와, “어딜 가나 말씀을 듣는 건 은혜죠”라는 평범한 대화들로 채워져 있었다.
누군가는 간식을 챙겨 왔다며 비닐을 열었고, 뒷좌석에서는 피곤한 눈으로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차창 너머로는 초겨울의 빛이 묘하게 흐릿하게 번져 있었고, 나는 그 빛을 바라보며 마음 한켠에서 서서히 밀려오는 불편한 예감의 파문을 느끼고 있었다. 선교회에서 준비한 세미나라 다들 들뜬 마음으로 가고 있었지만, 나만은 묵직한 돌 하나를 품고 있는 사람처럼 말을 아끼게 되었다. 이미 여러 차례 같은 유형의 세미나를 경험했기에, 앞으로 듣게 될 말들과 논리들, 그리고 거기에 열광하는 성도들의 반응이 대략 머릿속에 그려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예상이 맞았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세미나가 열리는 교회에 도착하자 낯선 긴장감이 공간을 가득 메웠다. 강사는 단호한 목소리로 창조연대는 6천 년이라고 말했다. 이어지는 설명은 예상대로였다. 수상한 연대측정 방식, 과학이라 하기에는 근거가 빈약한 도식들,
그리고 “문자 그대로 진리인 줄 믿습니다”로 시작되는 기도. 그 문장은 세미나 내내 나를 괴롭히며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 경험은 단순한 불편함을 넘어 한국 교회 안에서 창조 논의가 얼마나 편협한 궤도로 흘러가고 있는지를 다시 확인하게 했다. 내가 속한 교회의 현실, 그리고 한국 교회 안에서 창조와 과학이 놓여 있는 위치에 대해 깊은 질문을 던지게 했다. 그래서였는지, 이번 핵심과정의 내용은 그날 느꼈던 답답함을 해소하고자 하는 마음 위에 자연스레 얹혔다.

사진: Unsplash의 Masud Merzaye
이후 <핵심과정-과학>을 모두 수강하고, 강의 중에서 만난 과학의 세계는 새로운 시야를 열어줬다. 자연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서로 얽히고 흔들리며 살아가는 거대한 생명의 이야기였다. 생명은 어느 날 뚝 떨어진 완성품 같은 존재가 아니라, 긴 시간, 수많은 변수가 교차하며 만들어낸 경이였다. 현미경 아래에서 살아 움직이는 미생물들, 복잡한 네트워크를 이루는 세포와 DNA, 서로에게 환경이 되어주고 서로에게 생존 조건이 되어주는 생명체들의 연대는 창조 세계가 얼마나 넓은 호흡으로 움직이고 있는지를 알려주었다. 물리학이 그려내는 세계 역시 단순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불확정성과 상호작용, 우연과 질서의 경계에서 흔들리는 유기적 장(場)이었다. 그 속에서 인간은 세계를 정복하는 존재가 아니라, 겨우 그 안을 걸어가는 작은 존재였다. 이 겸손함은 오히려 내 신앙을 더 굳건하게 잡아주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마음 깊게 다가온 것은, 생명과 기술이 권력과 자본의 언어로 번역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생명이 정치의 대상이 되고, 기술이 삶의 구조를 재편하고, 기후 위기가 생존의 조건을 흔드는 시대. 그 속에서 신앙의 언어는 단순한 위로가 아니라, 인간의 존엄을 지키고 공동체의 연대를 회복하는 저항의 언어여야 한다는 사실을 절실히 느꼈다. 그 지점에서, 창조과학 세미나에서 느꼈던 답답함이 비로소 자리 잡았다. 문자주의적 확신은 신앙을 보호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오히려 세계의 복잡성을 감추고, 우리가 감당해야 할 신앙의 책임을 회피하는 길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몸으로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번 <핵심과정-과학>은 단순한 학습이 아니었다. 창조가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지금도 이어지고 있는 하나님 일이라는 사실, 세계가 고정된 완성품이 아니라 끊임없이 생성되는 생명이라는 사실, 인간이 그 생명의 장에서 서로 얽혀 살아가는 존재라는 사실이 나의 신앙을 다시 빚어내기 시작했다.
자연을 바라보는 시선도, 성경을 읽는 마음도 이전과는 달라졌다. 하나님은 더 크고 더 넓게 보이기 시작했다. 생명과 기술, 기후와 자본을 신학적 감각으로 다루고, 문자주의를 넘어 복잡한 세계 속에서 하나님을 발견하는 신앙으로 사람들을 만나고 싶어졌다.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던 순간, 이상하게도 처음 들었을 때 마음을 무겁게 짓누르던 한 문장이 다시 떠올랐다. 그날 창조과학 세미나에서 들었던 말, “문자 그대로 진리인 줄 믿습니다.” 나를 괴롭게 만들었던 그 말이 지금은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성경의 문장이 지닌 진리는 변하지 않지만, 그 진리가 풀어내고 비추는 세계는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넓고 깊었다는 사실을 이번 과정에서 새롭게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제는 그 문장을 들을 때 예전과 같은 답답함 대신, 마치 넓은 바다 앞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게 하는 은은한 용기 같은 것이 마음에 남는다. 한때는 나를 가두는 말처럼 느껴졌던 그 말이, 지금은 오히려 나를 더 큰 세계로 이끄는 메시지로 조용히 자리 잡았다.

사진: Unsplash의 Josh Calabrese
폴 틸리히(Paul Tillich, 1886-1965)는 하나님의 말씀을 성경 그 자체와 동일시하는 태도가 얼마나 위험한지 경고한 바 있다. 그의 말에 따르면, 계시는 단순히 문자에 갇혀 있는 정보가 아니라, 자연과 역사, 공동체와 개인, 그리고 인간의 언어와 경험을 통해서 일어나는 살아 있는 사건이다. 따라서 성경은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최종적 계시를 기록한 문서로써 거룩한 역할을 수행하지만, 그 자체가 계시 전체와 동일시될 수는 없다. 다시 말해, 말씀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드러내시는 사건이며, 성경은 그 사건을 증언하고 참여하는 기록이라는 것이다.
이를 다시 생각해보면, 신앙이란 결국 어떤 문장을 정확히 붙잡는 일이 아니라, 그 문장을 넘어 더 깊은 실재를 향해 나아가는 움직임에 가깝다. 신앙은 고정된 정의에 머무르지 않고, 존재의 깊고 넓은 자리로 우리를 이끄는 여정이며, 그 여정은 언제나 우리의 이해를 넘어서고 우리의 시야를 확장한다. 그래서 오래전 나를 무겁게 만들던 그 말도 이제는 다르게 들리며 다가오는 것이다. 문자에 갇힌 진리가 아니라, 문자 너머에서 계속해서 우리를 부르고 비추는 더 큰 진리의 목소리로서. 그 목소리가 이끄는 방향이라면, 나는 앞으로도 기꺼이 한 걸음 더 걸어갈 수 있을 것 같다.
Paul Tillich, Systematic Theology: Reason and Revelation, Being and God, 3 vols. in 1 (New York: Harper & Row; Evanston, IL: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67), vol. 1, 159.
Ibid, 158-159.
핵심과정 수강 후기
《핵심과정-과학》을 듣고
글ㅣ김기원
《핵심과정-과학》을 수강하는 동안, 나는 얼마 전 교회에서 지방 선교회 행사로 다녀온 창조과학 세미나의 기억을 문득 떠올리게 되었다. 이전에도 비슷한 세미나를 들은 적 있기에 그 세미나가 어떤 분위기와 논조를 띠고 있을지 짐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전도사로 사역하는 입장에서 빠질 명분은 없었기에, 결국 교인들이 타고 있는 작은 승합차에 함께 올라탔다.
출발하기 전, 사무실에서 부목사님이 조심스레 말을 걸어왔다.
“전도사님, 마음 단단히 먹으셔야 해요.”
나는 예감이 좋지 않음을 느끼며 되물었다.
“왜요?”
부목사님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지난 세미나를 들어보니 익룡이랑 티렉스 같은 공룡이 구약시대에도 실존했다고 이야기해요. 성도님들은 거기서 아멘을 외치고요.”
그 말을 듣는 순간, 마음에 불편함이 밀려들었다. 나는 짧게 “쉽지 않네요.”라고 답했지만, 이미 출발한 승합차같이 좀처럼 가라앉은 마음을 쉽게 추스르지 못했다.
차 안은 늦은 오후 특유의 나른한 공기와, “어딜 가나 말씀을 듣는 건 은혜죠”라는 평범한 대화들로 채워져 있었다.
누군가는 간식을 챙겨 왔다며 비닐을 열었고, 뒷좌석에서는 피곤한 눈으로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차창 너머로는 초겨울의 빛이 묘하게 흐릿하게 번져 있었고, 나는 그 빛을 바라보며 마음 한켠에서 서서히 밀려오는 불편한 예감의 파문을 느끼고 있었다. 선교회에서 준비한 세미나라 다들 들뜬 마음으로 가고 있었지만, 나만은 묵직한 돌 하나를 품고 있는 사람처럼 말을 아끼게 되었다. 이미 여러 차례 같은 유형의 세미나를 경험했기에, 앞으로 듣게 될 말들과 논리들, 그리고 거기에 열광하는 성도들의 반응이 대략 머릿속에 그려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예상이 맞았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세미나가 열리는 교회에 도착하자 낯선 긴장감이 공간을 가득 메웠다. 강사는 단호한 목소리로 창조연대는 6천 년이라고 말했다. 이어지는 설명은 예상대로였다. 수상한 연대측정 방식, 과학이라 하기에는 근거가 빈약한 도식들,
그리고 “문자 그대로 진리인 줄 믿습니다”로 시작되는 기도. 그 문장은 세미나 내내 나를 괴롭히며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 경험은 단순한 불편함을 넘어 한국 교회 안에서 창조 논의가 얼마나 편협한 궤도로 흘러가고 있는지를 다시 확인하게 했다. 내가 속한 교회의 현실, 그리고 한국 교회 안에서 창조와 과학이 놓여 있는 위치에 대해 깊은 질문을 던지게 했다. 그래서였는지, 이번 핵심과정의 내용은 그날 느꼈던 답답함을 해소하고자 하는 마음 위에 자연스레 얹혔다.
사진: Unsplash의 Masud Merzaye
이후 <핵심과정-과학>을 모두 수강하고, 강의 중에서 만난 과학의 세계는 새로운 시야를 열어줬다. 자연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서로 얽히고 흔들리며 살아가는 거대한 생명의 이야기였다. 생명은 어느 날 뚝 떨어진 완성품 같은 존재가 아니라, 긴 시간, 수많은 변수가 교차하며 만들어낸 경이였다. 현미경 아래에서 살아 움직이는 미생물들, 복잡한 네트워크를 이루는 세포와 DNA, 서로에게 환경이 되어주고 서로에게 생존 조건이 되어주는 생명체들의 연대는 창조 세계가 얼마나 넓은 호흡으로 움직이고 있는지를 알려주었다. 물리학이 그려내는 세계 역시 단순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불확정성과 상호작용, 우연과 질서의 경계에서 흔들리는 유기적 장(場)이었다. 그 속에서 인간은 세계를 정복하는 존재가 아니라, 겨우 그 안을 걸어가는 작은 존재였다. 이 겸손함은 오히려 내 신앙을 더 굳건하게 잡아주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마음 깊게 다가온 것은, 생명과 기술이 권력과 자본의 언어로 번역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생명이 정치의 대상이 되고, 기술이 삶의 구조를 재편하고, 기후 위기가 생존의 조건을 흔드는 시대. 그 속에서 신앙의 언어는 단순한 위로가 아니라, 인간의 존엄을 지키고 공동체의 연대를 회복하는 저항의 언어여야 한다는 사실을 절실히 느꼈다. 그 지점에서, 창조과학 세미나에서 느꼈던 답답함이 비로소 자리 잡았다. 문자주의적 확신은 신앙을 보호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오히려 세계의 복잡성을 감추고, 우리가 감당해야 할 신앙의 책임을 회피하는 길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몸으로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번 <핵심과정-과학>은 단순한 학습이 아니었다. 창조가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지금도 이어지고 있는 하나님 일이라는 사실, 세계가 고정된 완성품이 아니라 끊임없이 생성되는 생명이라는 사실, 인간이 그 생명의 장에서 서로 얽혀 살아가는 존재라는 사실이 나의 신앙을 다시 빚어내기 시작했다.
자연을 바라보는 시선도, 성경을 읽는 마음도 이전과는 달라졌다. 하나님은 더 크고 더 넓게 보이기 시작했다. 생명과 기술, 기후와 자본을 신학적 감각으로 다루고, 문자주의를 넘어 복잡한 세계 속에서 하나님을 발견하는 신앙으로 사람들을 만나고 싶어졌다.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던 순간, 이상하게도 처음 들었을 때 마음을 무겁게 짓누르던 한 문장이 다시 떠올랐다. 그날 창조과학 세미나에서 들었던 말, “문자 그대로 진리인 줄 믿습니다.” 나를 괴롭게 만들었던 그 말이 지금은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성경의 문장이 지닌 진리는 변하지 않지만, 그 진리가 풀어내고 비추는 세계는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넓고 깊었다는 사실을 이번 과정에서 새롭게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제는 그 문장을 들을 때 예전과 같은 답답함 대신, 마치 넓은 바다 앞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게 하는 은은한 용기 같은 것이 마음에 남는다. 한때는 나를 가두는 말처럼 느껴졌던 그 말이, 지금은 오히려 나를 더 큰 세계로 이끄는 메시지로 조용히 자리 잡았다.
사진: Unsplash의 Josh Calabrese
폴 틸리히(Paul Tillich, 1886-1965)는 하나님의 말씀을 성경 그 자체와 동일시하는 태도가 얼마나 위험한지 경고한 바 있다. 그의 말에 따르면, 계시는 단순히 문자에 갇혀 있는 정보가 아니라, 자연과 역사, 공동체와 개인, 그리고 인간의 언어와 경험을 통해서 일어나는 살아 있는 사건이다. 따라서 성경은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최종적 계시를 기록한 문서로써 거룩한 역할을 수행하지만, 그 자체가 계시 전체와 동일시될 수는 없다. 다시 말해, 말씀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드러내시는 사건이며, 성경은 그 사건을 증언하고 참여하는 기록이라는 것이다.
이를 다시 생각해보면, 신앙이란 결국 어떤 문장을 정확히 붙잡는 일이 아니라, 그 문장을 넘어 더 깊은 실재를 향해 나아가는 움직임에 가깝다. 신앙은 고정된 정의에 머무르지 않고, 존재의 깊고 넓은 자리로 우리를 이끄는 여정이며, 그 여정은 언제나 우리의 이해를 넘어서고 우리의 시야를 확장한다. 그래서 오래전 나를 무겁게 만들던 그 말도 이제는 다르게 들리며 다가오는 것이다. 문자에 갇힌 진리가 아니라, 문자 너머에서 계속해서 우리를 부르고 비추는 더 큰 진리의 목소리로서. 그 목소리가 이끄는 방향이라면, 나는 앞으로도 기꺼이 한 걸음 더 걸어갈 수 있을 것 같다.
Paul Tillich, Systematic Theology: Reason and Revelation, Being and God, 3 vols. in 1 (New York: Harper & Row; Evanston, IL: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67), vol. 1, 159.
Ibid, 158-1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