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이야기가 만나다>의 저자 안용성 목사님 인터뷰

과학과 신학의 대화
2021-0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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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이야기가 만나다: 요한계시록 서사로 읽기>의 저자
안용성 목사님 인터뷰

                                                        

성경 66권 중에서 가장 난해하고 두렵게 느껴지는 본문은 요한계시록일 것이다. 칼뱅의 경우 요한계시록이 난해해서 주석을 하지 못한다고 말할 만큼 수많은 상징과 은유 비유들로 기술하고 있으며, 모든 감각을 총동원해서 읽어야 하는 텍스트이다. 그렇기 때문에 요한계시록에 대한 쉽고 간명한 해석을 교회에서도 듣기가 어려운 것이 사실이며 이단들에 의해 무섭고 두려운 이야기로 유린당한 본문이기도 하고, 특정 집단이 그들의 주장과 이득을 정당화하기 위해 사용하기도 했다. 이를테면, 심판, 휴거, 144000이라든가 천년왕국과 같은 개념을 사용해 잘못된 성경 해석을 낳았고, 그 결과 요한계시록은 겁나고 두렵고 피하고 싶은 본문이 아니었나 싶다. 대체 요한계시록은 무엇을 말하려는 것일까? 요한계시록은 죽임 당한 어린양이 이 땅을 하늘과 같이 만들 것이라는 격려와 위로를 주고, 지금 있는 이 자리에서 결코 흔들리지 말고 진리와 선과 아름다움을 선택하고 그것을 유지하라고 격려하는 이야기다.

 

텍스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 텍스트가 쓰인 시대적인 상황을 기반으로 해서 접근해야 하며, 저자의 의도와 텍스트의 장르를 알아야 한다. 요한계시록의 시대적 상황은 서기 70~95년으로 로마제국의 폭정이 절정에 달한 시기, 즉 로마제국이라는 억압적인 정치 환경이었다. 요한계시록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주류 종교에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심적 정치적 압박과 경제적 압박의 가능성이 있었다. 집회와 결사의 자유가 없었기 때문에 합법 종교의 틀 안에서 모일 수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밧모섬에 있는 장로 요한은 예수를 주요 그리스도로 믿는 사람들에게 주변의 적대적인 것과, 교회 내 믿는 사람들의 갈등 속에서 어떻게 참된 신앙을 유지할 수 있을지에 관한 관심과 노력을 가지고 요한계시록을 썼다. 요한계시록은 이른 새벽과 해 질 무렵의 저녁시간에 신앙인들이 모여 있으면 앞에서 신앙의 지도자가 낭송해주고 듣게 하는 형식으로 읽혔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모든 감각을 동원해서 보고 듣고 느끼고 맛보고 만지듯이 혹은 그림을 보듯이 음악을 듣듯이 상상력을 동원해서 읽어야 하는 텍스트다.

 

영국 시인이자 화가인 월리엄 블레이크는 요한계시록의 4장과 5장에서 펼치는 경배와 찬양의 모습을 그림으로 아름답게 표현했다. 그의 그림 속으로 들어가 요한계시록의 핵심 메시지를  만나보자.   



 

가운데 보좌에 하나님이 앉아계신다. 하나님은 오른쪽에 일곱 인이 있는 두루마리를 들고 계시고 하늘 어전 맨 위에는 무지개가 떠있다. 네 생물의 날개에는 눈이 가득하게 박혀있고 그 눈은 땅에 있는 모든 것을 내려다보고 감시하고 있는데 어쩌면 피조세계를  보호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아래쪽에는 스물네 장로가 자기의 왕관을 벗어서 하나님 앞에 놓고 경배하고 있고, 맨 아래는 일곱 영의 불이 빛나고 있다. 이 장엄한 광경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거룩한 존재들, 위대하고 어마어마한 존재들, 이런  존재들이 모두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그분의 권위와 권력과 영광을 찬양하고 있음을 통해 하나님의 통치하심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 땅에서 지금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더라도 하나님께서는 통치권을 놓치신 적이 없다는 것과 비록 지금 고난과 고통 속에 있더라도 우리 하나님은 주권을 놓지 않고 계신다는 것을 알게 하려는 것이다. ‘우리 하나님은 지금도 찬양받고 계신다’라는 믿음 속에서 신앙의 굳건함을 유지할 수 있도록 격려와 위로를 하려는 것이고 우리의 삶은 그러한 하나님을 예배하는 삶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요한계시록을 그림처럼 음악처럼 설명해주는 책은 없을까? 복잡한 신학적인 개념보다 이야기의 흐름 위주로 음악을 듣듯이 쉽게 거기다 재밌게 읽을 수 있는 책이 있다면 참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차에 딱 맞는 책을 접하게 되었다. 그루터기 교회의 담임 목사님이시고, 서울여자대학교에 교수이신 안용성 목사님의 저서 「두 이야기가 만나다: 요한 계시록 서사로 읽기」 가 출간된 것이다. 게다가 새물결플러스에서 온라인으로 저자 강연이 있다는 소식을 접한 터라 저자를 만나 책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취재를 다녀왔다. 저자와 나눈 인터뷰 내용은 다음과 같다.

 


 

백우인(백): 요한계시록은 제목만 들어도 무섭고 피하고 싶고 안 읽고 싶어지는 텍스트로 오해받고 있습니다. 해석도 다양해서 어떤 것을 신뢰해야 하는지도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은 어떻게 하면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을까요? 목사님의 신간 「두 이야기가 만나다: 요한계시록 서사로 읽기」의 목적은 무엇인가요?

 

안용성(안): 요한계시록은 요한의 환상 이야기로 되어 있습니다. 서사문학이지요. 요한계시록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무슨 이야기인지를 알아야 하고, 그 다음에 그것의 의미와 메시지가  무엇이냐를 알아야 하는데, 대부분 첫 단계에서 걸리곤 합니다. 이 책의 목적은 요한계시록에 무슨 이야기가 담겨 있는지를 먼저 파악하고 그 의미가  무엇인지 쉽게 알아보는 데 있습니다.

 

백: 요한계시록을 이야기로 읽더라도 목사님 말씀처럼 복잡해서 어렵게 느껴지는데, 혹시 목사님 책에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비밀이 있나요?

 

안: 요한계시록은 시간의 순서대로 이야기가 진행되지만 단선적인 진행이 아니예요. 중심 줄거리와 삽입부가 따로 흐르다가 합류하는 구조로 되어있습니다. 그리고 천상에서의 이야기와 땅에서의 이야기가 있고 이 두 개의 흐름이 새 예루살렘에서 만나는 구조입니다. 이때 새 예루살렘은 초월과 내재가 하나 된 공간이며, 하나님을 얼굴과 얼굴로 만나게 되는 곳입니다. 즉 인간의 감각 범위 안에 하나님이 계시죠.

 

백: 두 이야기가 만난다는 것이 그런 의미였군요. 그러면서 초월과 내재의 지평이 융합되는 구조고요. 갑자기 복잡하던 것들이 간결하게 드러난 느낌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 바벨론의 멸망에 대해 상당히 많이 다루는데 왜 그런가요?

 

안: 요한계시록이 보여주는 현실의 구조는 심층에 사탄이 있고 그 위로 짐승, 그리고 표층에 바벨론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에서 바벨론은 로마제국인데, 바벨론은 현실적 도구일 뿐입니다. 짐승이 세상을 집어삼키기 위해 도구들을 바꾸어가면서 세상에 나타나는데 그중 하나가 바벨론입니다. 오늘날 짐승은 국가가 아닌 또 다른 옷을 입고 나타납니다. 세상에서 왕 노릇 하는 사탄을 하나님께서 제거하고 하나님이 세상을 통치하실 것을 보여주는 종말은 현실 문제의 해결을 의미합니다.

 



 

백: 하나님께서 악의 무리를 심판하고 피조세계의 통치자임을 알게 한다는 말은 어떤 관점에서는 요한계시록이 폭력을 정당화 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안: 자칫 그렇게 오해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요한계시록의 내용을 잘 살펴보면 잔인한 폭력은 사탄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사탄 세력이 사탄을 심판하죠. 예를 들어 5번째 나팔 장면에서 심판자로 등장하는 황충은 무저갱에서 올라오는데, 무저갱은 사탄의 장소잖아요. 요한계시록 17장에서 음녀가 짐승을 타고 나타나는데  그 후에 짐승이 바벨론을 처단하죠. 여기서도 사탄의 세력이 폭력을 쓰는 것입니다. 19장에서 예수 재림 이후의 심판도 보세요. 예수님을 따르는 군대는 희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고 있습니다. 이것은 예식 하거나 죽은 시체에게 입히는 것이지 전투 복장이 아닙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게 뭐겠어요?  싸우려는 게 아닌 거죠. 예수님의 입에서 예리한 검이 나오는데 그것은 말씀의 검입니다. 아마겟돈 전쟁에서도 전쟁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폭력이 가장 정당화 될 수 있는 책으로 오해될 수 있지만 폭력이 아예 없지는 않더라도 최대한 줄이려고 했습니다. 또 폭력의 정의는 시대마다 다르죠. 훈육이나 처벌 수준의 폭력부터 무참히 죽이는 폭력까지 다양한 양상이 있을 텐데, 요한계시록 당시는 폭력이 일상화된 시대였습니다. 그런데도 요한계시록은 폭력에 대해 제한적으로만 쓰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폭력을 쓰지 않는 종말을 말하고 있습니다.

 

백: 힘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 힘을 억제함으로써 정의와 사랑을 실현했고, 바로 그런 존재가 우리의 구원자이고 그 구원자가 가는 길 어느 곳이나 따라가겠다고 결심하는 사람들이 성도들이라고 요한계시록은 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자연의 심판과 관련해서 종말은 기존 창조의 소멸인지, 구원은 어디서 이루어지는지 궁금합니다.

 

안: 먼저 요한계시록의 구원은 새 예루살렘이 땅으로 내려와 초월과 내재가 함께 있는 곳입니다. 즉 하늘과 땅이 함께 있는 것인데 이때 땅을 지상이라는 의미보다는 초월이 침투한 곳으로서의 공간으로 이해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자연세계를 파괴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자연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을 심판의 도구로 사용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자연은 하나님의 조력자입니다. 그리고 창조세계의 회복이 곧 구원입니다. 샬롬이 파괴된 이 세계를 온전하게 회복하는 것이 종말이지요. 있던 것을 다 없애고 새로 세우는 것이 아니라 파괴된 에덴동산의 회복을 말하는데 이 회복된 것이 바로 새 예루살렘입니다.

 

백: 목사님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궁금했던 요한계시록 텍스트가 희망으로 꿈틀거리게 하는 내용으로 그려집니다. 목사님의 신간 「두 이야기와 만나다: 요한 계시록 서사로 읽기」에는 쉽고 재밌는 내용들이 더 많이 있는 거지요? 많은 분들이 읽으시면서 그동안 요한 계시록에 대한 오해에서 벗어나면 좋겠습니다. 귀한 시간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글 | 백우인 (bwooin@naver.com)

과신대 실행위원이자 출판팀장으로 섬기고 있다. 과신뷰에 "과학과 예술의 만남"이라는 주제로 글을 연재하고 있다. 감리교신학대학교 종교철학과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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