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나모 후기] "17세기 개신교 루터파 정통주의 창조를 이야기 하다" (배상수)

과학과 신학의 대화
2024-0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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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의 신학》 책나모 후기

17세기 개신교 루터파 정통주의 창조를 이야기하다 


글ㅣ배상수
어린이집/'상수네책방'책모임 운영
과신대 목회자모임/샤르댕북클럽


@Didgerman, pixabay


지난 4월 22일부터 5월 11일까지 ‘과학과신학의대화’, ‘청어람ARMC’, ‘김근주읽기’ 세 단체가 연합으로 박영식 교수님의 《창조의 신학》 ‘함께 읽기 챌린지’를 진행했습니다. 88명이 이 챌린지에 참여해 주셨는데요. 그 중 과신대를 통해 챌린지에 참여하신 배상수 님의 이야기를 듣고자 합니다.

(아래 글은 배상수 님이 기고해 주신 독서 후기를 가상 인터뷰 형식으로 재구성하였습니다.)


과신뷰(이하 뷰) : 안녕하세요. 배상수 님. 《창조의 신학》 ‘함께 읽기 챌린지’에 참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챌린지에 참여하게 된 이유가 있으신가요? 

배상수(이하 배) : 챌린지 전에 박영식 교수님을 '과신대 목회자모임'에서 만난 적이 있습니다. 질문 전 강의에서 평소에 듣지 못하던 개념들을 사용하는 것을 듣고서 '뭐지?'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 후에 책을 접하게 되었고 책 뒤편에 참고도서 목록을 보고 한번 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책을 줄 치며 열심히 봤는데 책 후반에 파본 된 것을 발견하고 주춤했습니다. 책을 교환하여 다시 읽게 됐죠. 두 번 보게 돼서 더 잘 읽을 수 있었습니다.  또 교수님이 학교에서 어려움 당한다는 소식을 듣고 챌린지에 함께 하게 됐습니다. 지적 호기심과 아픔에의 동참이 챌린지 참여 이유가 됐습니다. 


뷰 : 네, 그러셨군요. 과신대 목회자 모임에서 박영식 교수님을 만났었다니 더 반갑습니다. 이 책을 구매하게 동기도 궁금합니다.

배 : 처음에 이 책을 구입하게 된 동기는 뒷편의 참고문헌 때문입니다. 한번 봐야겠다고 생각하고 책을 구매했습니다. 우리나라에 '과학과 신학의 대화'라는 단체도 있지만, 이 책은 신학과 과학의 대화처럼 여겨졌습니다. 과학보단 신학에 가까운 나로서는 반가운 일이죠. 신학을 이야기하지만 창조를 주제로 하므로 과학 이야기도 자연스레 따라나옵니다.

또 다른 동기는 월간지 《복음과 상황》에서박영식 교수님이 학교에서 받은 징계에 관한 내용을 다룬 기사를 읽게 되었어요. 징계 원인이 2020년 학교에 창조과학 수업 개설을 반대했다는 이유에서 시작된 갈등 때문이었죠. 해당 사안은 당시엔 결론이 나지 않은 문제였지만(현재 학교 당국으로부터 해임 통보를 받은 것으로 결론이 났습니다) 덕분에 교수님의 책 《창조의 신학》을 알게 됐고 읽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책을 읽다 보니 '계속적 창조'와 '매개적 창조'라는 개념도 접하게 되었고요. 


 : ‘계속적 창조'와 ‘매개적 창조'라는 개념을 접하셨을 때 어떤 생각이 드셨나요? 대다수 한국 기독교는 창세기 1~2장의 창조 기사를 보며 하나님께서 ‘완성된 형태로 창조하셨음’을 믿고 있는데요. 이 책에서 말하는 두 가지 창조 개념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에게 어떤 통찰을 줄 수 있을까요? 우리가 창조 신학을 공부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배 : ‘계속적 창조’는 17세기 개신교 정통주의 입장입니다. 하나님의 창조는 계속되고 피조물인 우리를 통해서 새로운 역사를 창조하신다는 말이죠. 이런 내용을 보면 지난 시절 교리 공부만 잘했었어도 현재 필요한 신학의 내용을 찾을 수 있었을 것 같습니다.

서론에서 저자는 “이제 하나님의 창조를 다시 기억하고 묵상함으로써 인간에 의해 파괴된 생태계의 현실을 통렬하게 반성하며 하나님의 창조에 대한 지난날의 오해를 수정하고 진정으로 하나님의 창조를 찬양하는 성서적 의미가 무엇인지 깊이 숙고해야 할 때가 왔다.”(25쪽)고 했습니다. 

저는, 이런 면에서 이 시대에 창조 신학이 필요하며, 그동안 신학에서 구원과 속죄를 강조했다면 이제는 창조 신학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종교는 그 종교가 속해 있는 시대와 대화하며 나아갑니다. 현대는 환경, 자연, 기후가 망가진 시대인데, 이런 시대에 기독교가 소리를 낼 수 있는 주제 중 하나가 창조 신학이 아닐까요?

창조 신학은 원죄 이전에 있었던 ‘원복’과도 연결됩니다. 기독교 역사에서 원죄와 함께 원복을, 구속과 함께 창조를 이야기하는 전통이 있는데, 이에 대해선 매튜 폭스의 책 《원복》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 하나님이 창조하신 ‘자연’에 관한 내용을 읽었을 때 어떤 생각이 드셨나요? 자연에 대해 사람이 가져야 할 책임은 어떤 것이 있을까요? 창조 신학을 현재 직면하고 있는 생태계의 많은 문제와도 연결할 수 있을까요?

배 : 《창조의 신학》 69쪽에 "정복하고 다스리라는 명령을 인간'에게' 주셨지만, 인간을 '위해' 정복하고 다스리라는 명령은 아니다. 다스림과 정복은 우리 인간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생명세계 전체를 위해 인간에게 주어진 자연 돌봄과 섬김의 명령이다."라는 내용이 나옵니다.

현대 철학에서도 위의 이야기를 뒷받침할 사조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신유물론’입니다. 인간을 중시하는 만큼 물질, 자연을 중히 여기는 사조이죠. 구유물론-들뢰즈-신유물론으로 흐름이 이어지는데, 이 중 신유물론은 환경 생태계와도 연결됩니다. 사람 이외 모든 자연의 능동성도 강조하고, 과학 양자역학의 얽힘 개념도 사용됩니다. 이전에는 사람이 중시됐으나 신유물론에 와서는 비(非) 사람도 중시됩니다. 현시대 대두하는 질문에 답변코자 등장한 철학 사조이죠.

자연 돌봄과 섬김에 관한 정신은 우리 민족의 ‘동학’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동학의 강조점이 경천, 경인, 경물인데요. 기독교의 언어로 표현하면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이라고 할 수 있죠. 경물은 자연 사랑, 환경 보호와도 연결됩니다. 철학의 신유물론과 연결되는 지점입니다.


뷰 : ‘신유물론’에 대한 이야기가 흥미롭네요. 혹시 이와 비슷한 또 다른 교회 전통이나 철학 사조가 더 있을까요? 

배 : 켈트 영성도 있습니다. 기독교 초창기에는 아우구스티누스의 구속전통과 함께 켈트 영성이 있었는데요. 켈트 영성은 기독교 역사의 어느 시점에선가 묻혔지만, 이 시대에 그 전통을 되살릴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켈트 영성은 생명 세계 전체, 자연 돌봄을 실천하는 데까지 이어지니까요. 

이처럼 시대의 다양한 사조는 생태계, 창조세계 돌봄에 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바쁘다는 핑계로 그걸 외면하고 있는 현실이 안타깝지요.


뷰 : 《창조의 신학》을 읽으면서 기독교 역사와 철학까지 연결하시는 배상수 님의 인문학적 소양에 감탄하게 됩니다. 현재 한국 기독교는 역사, 철학, 과학 등 다른 학문과의 대화가 요원한 것 같아 조금 안타까운데요. 대표적으로 우주와 생물의 ‘진화’조차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죠. 이에 관해 책을 읽으면서 어떤 생각이 드셨는지 궁금합니다. 기독교에서는 절대 ‘진화론'을 받아들이면 안 되는 걸까요? 기존 신학에서 근거가 되는 내용이 있나요?

배 : 《창조의 신학》 69쪽에 "하나님은 창조된 피조 세계의 생성과 변화와 더불어 그리고 하나님의 창조행위에 상응하는 인간의 창조행위를 통해서 피조세계를 다스리신다. 이제 하나님의 창조는 소위 태초의 창조를 넘어 계속되는 창조와 새 창조를 포괄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라는 내용만 보더라도, 기독교 신학은 진화의 과정을 받아들일 수 있는 교의학적 틀을 갖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교의학에서 하나님의 창조는 '태초의 창조'-'계속되는 창조'-'마지막 창조'로 구분되지요. 이는 17세기 개신교 루터파 정통주의에서 나왔습니다. 창조를 '직접적 창조'와 '매개적 창조'로 구분하고, 시간과 관련해서는 보존-협동-조정으로 '계속되는 창조'로 보고 이를 하나님의 섭리로 이해했습니다.

이런 교의학적 개념은 과학 이론으로서의 진화를 품을 수 있는 큰 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일반적으로 태초의 창조로 하나님 사역의 종결을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루터파 정통주의 창조개념은 태초의 창조 종결 개념을 넘어섭니다. 창조는 과거에서 멈춘 것이 아닌 미래에도 지속됩니다. 그런 면에서 생물체의 진화는 하나님의 계속되는 창조와 섭리 안에 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보존-협동-조정에서 협동을 "앞선 협동이 아니라 동시적 협동으로, 예정하는 것이 아니라 부드럽게 명령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라는 개신교 루터파 정통주의는 창조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보여줍니다. 이런 언급은 생명의 진화를 하나님의 섭리와 연결해 볼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합니다.

따라서 신학은, 생명의 기원이나 우주의 기원에 대한 부분을 ‘하나님의 창조를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내용’으로 삼을 수도 있겠습니다. 예로는 빅뱅이론을 무로부터의 창조와 연관해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진화론도 하나님의 구원사를 역동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틀로 바라보면 어떨까요?

역사적으로 이런 시도를 한 사람들이 꽤 많이 있습니다. 떼이야르 샤르댕은 구원사와 계시사를 진화론적으로 구축했습니다. 판넨베르크는 점진론적 계시 이해로 과학적 용어와 연구를 신학에 활용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고, 힘에 대한 장이론을 통해 성령의 활동을 설명하려고도 했습니다. 존 호트는 카오스와 복잡성 이론을 신론에 적용하려 했고, 파울 틸리히는 조직신학 3권에서 생명의 다차원성을 서술했는데 진화론적 세계 이해를 자신의 신학적 견해에 편입시켜 놓았습니다. 

6장을 읽으면서 진화를 수용하는 창조 신학을 개진하기 위해서는 폭넓은 공부가 요구됨을 볼 수 있습니다. 개신교 신학도 폭이 넓은데 그 중 17세기 개신교 루터파 정통주의의 교의는 진화를 수용하는 창조 신학 이해에 특히 도움이 됩니다. 또 떼이야르 샤르댕, 판넨베르크, 존 호트, 파울 틸리히, 한스 큉 등 학자들의 이론도 균형 있는 창조 신학을 갖는 데 도움이 됩니다. 물론 공부해야 할 내용은 이보다 더 많지만요.


뷰 : 최근 일련의 사건을 보며 여전히 창조세계를 바라보는 시선이 ‘과거'에 머물러 있다고 느껴집니다. 21세기 신앙인은 21세기에 맞는 신학을 가져야 할 텐데요. 우리 주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전하고 싶은 바람이 있다면 한 말씀 해주시겠어요?

배 : 하나님이 좋다고 말씀하셨던 창조세계는 병들어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기후위기, 코로나 등 인간 중심적 사고와 삶이 오히려 인간을 위협하는 계기가 됐습니다.

철학에서 이런 일을 반성이라도 하듯 신유물론이 등장했고, 우리 조상도 경천, 경인, 경물을 이야기하던 동학을 주장했으며, 기독교 전통에서 켈트 영성이 창조의 선함과 아름다움을 강조했던 것처럼, 이제는 개신교도 인간만의 구원을 강조하는 협소한 관점에서 벗어나 현시대를 읽고 대화하고 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지금도 ‘창조 과학’으로 내부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청년집회에도 ‘창조 과학’을 주장하는 강사가 서기도 합니다.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죠. 이제는 기독교가 과거가 아닌 미래, 그리고 창조와 치유를 적극 이야기하는 분위기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창조 신학을 논할 때 어느 책 제목처럼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 이런 분위기를 벗어나면 좋겠습니다.


@lil_foot, pixabay


뷰 : 《창조의 신학》 ‘함께 읽기 챌린지’를 성공적으로 마치셨는데, 참여하신 소감 한 말씀 부탁합니다. 그리고 이 챌린지에서 얻은 유익이 있었다면 말씀해 주시면 좋겠어요.

배 : 이 챌린지를 참여하면서 몇 가지 유익한 점을 얻었습니다. 먼저 정해진 분량을 읽어서 좋았습니다. 혼자 읽으면 많은 양을 읽고 생각할 시간이 없는 때도 있는데, 챌린지 독서는 정해진 양을 읽고 난 후 여유시간에 생각할 수 있지요. 이런 여유시간에 아이디어가 솟아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독서가 아닌 다른 행동(산책이나 운동)을 통해서 이 시간을 유용하고 알차게 보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챌린지를 통해 읽는 동안 메모를 했는데, 그 메모가 글쓰기의 종자가 되어 주었습니다. 메모가 쌓이니 이 메모를 통해 새로운 글을 쓸 수 있더라고요. 그리고 무엇보다 챌린지를 통해 함께 읽으면 평소 제가 읽을 수 있는 양보다 더 많이 읽을 수 있습니다. ‘빨리 가려면 혼자 가고 멀리 가려면 함께 가라’는 말이 있지요. 챌린지가 이와 같아요. 혼자 읽으면 빠른 속도로 더 많이 읽을 수 있을 것 같지만, 오히려 함께 읽을 때 그런 효과가 있어요. 같은 내용을 읽은 다른 사람은 어떤 생각을 하는지도 엿볼 수 있고요.

마지막으로, 이 챌린지를 통해 타인의 고통에 동참하는 읽기를 할 수 있어서 유익했습니다. 보통 독서는 자신을 위한 독서일 경우가 많은데요. 이번 독서는 그렇지 않아서 더 특별했어요. ‘내 독서를 통해 다른 이의 고통에 동참’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번 독서는 박영식 교수의 징계와 맞물려 진행된 독서였습니다. 교수님은 ‘창조 과학’을 비판했다는 이유로 어려움을 당했는데, 뜻을 함께하는 이들이 독서라는 매개를 통해 고통을 함께 나누는 시간이 되어 더 의미 있었습니다.


이번 함께 읽기 챌린지는 박영식 교수님을 향한 서울신학대학교의 부당한 징계 요구에 반대 목소리를 내기 위해, 박영식 교수님을 응원하고 연대하기 위해 시작됐습니다. 학교 당국과 이사회가 ‘성결교의 창조 신학에 위배 된다’며 문제 삼았던 내용이 과연 정말 문제인지 무엇이 문제인지 우리가 이 책을 함께 읽으며 찾아보고자 하는 의도도 있었죠. 아직 박영식 교수님의 책 《창조의 신학》을 읽지 않으셨다면 이번 기회에 읽어보시길 권하고 싶습니다. 귀한 후기를 남겨주신 배상수 님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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