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 독후감

마커스 보그의 고백
- 기억에서 회심으로, 그리고 확신으로
마커스 J. 보그 지음, 민경찬 · 손승우 옮김ㅣ비아 ㅣ2025
"두 달간 마커스 보그의 이야기를 함께 읽으며 깊은 생각과 마음을 나눠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 책에서도 함께해요🙌" - 과신뷰 편집팀
* 선정된 독후감은 제목 가나다 순으로 게시하였습니다. 다음 달 선정 도서는 게시글 마지막에서 확인해 주세요. 😉
진리의 여정, 경이의 신앙
마커스 보그 저,《마커스 보그의 고백》을 읽고
글ㅣ김영웅
기초과학연구원 유전체교정연구단 선임연구원
과신대 정회원, 후원이사
이 책은 70년이란 세월을 살아낸 마커스 보그가 그의 ‘기억’, 그가 경험한 세 가지 측면에서의 ‘회심’, 그리고 그 여정에서 얻은 ‘확신’이라는 세 가지 키워드로 삶을 돌아보며 그리스도교 신앙과 신학에 관련된 생각을 정리한 역작이다. 삶을 진지하게 성찰하고 치열하게 살아온 사람이라면, 특히 그 사람이 나이가 지긋이 든 경우라면, 내겐 우선적인 경청의 대상이 된다. 나는 근본주의적 보수 신앙을 가진 채 시대의 조류와 어쩌다 맞아떨어져 연예인처럼 부와 명예와 힘을 거머쥐고 화려한 인생을 살다가 추하게 늙어버린 목회자들과 신학자들을 여럿 알고 있다. 그들의 말과 글은 공허하여 더 이상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진리라면 시대가 변해도 변함없이 진리여야 한다는 믿음이 내게 있기 때문일 것이다. 진정한 어른, 진정한 믿음의 선진들이 희박해진 이 시대에 마커스 보그라는 존재는 빛나는 옥석이 아닐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일까. 이 책이 나오자마자 나는 손에 넣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마커스 보그가 이 책에서 사용하는 주요한 단어와 문장들에 마음을 빼앗겨버렸다. 신앙은 여정이라는 것, 회심은 갑작스럽고 극적일 수도 있지만 점진적이고 점층적인 경우가 더 많다는 것, 하나님은 실재하며 신비하다는 것, 그리스도교인이 된다는 건 올바른 신념, 지적으로 정확한 신학을 갖는 것만이 아니라는 것, 경이야말로 그리스도교인으로서의 여정을 형성하는 중요한 확신일 수 있다는 것, 구원은 내세보다 여기에서의 삶에 관한 기쁜 소식이라는 것, 성서는 문자적으로 사실이 아니어도 참일 수 있다는 것, 예수의 죽음을 대속만으로 이해하면 여러 신학적 문제가 발생한다는 것, 복음은 단순히 내면의 평안이나 영혼 구원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 복음은 제국에 맞서 세상이 어떠한 모습이어야 하는지를 이야기하는 전망이자 꿈이었다는 것, 그래서 성서는 정치적이라는 것, 등의 메시지가 내 머릿속과 마음판에 견고하게 박혔다. 하나씩 간단하게 살펴보자.
@Unsplash, Clint Patterson
먼저, 신앙은 여정이라는 말에서 나는 내가 언젠가부터 좋아하게 된 ‘여정’이라는 단어에 끌렸다. 그렇다. 나는 인생도 그렇지만 신앙 역시 여정이라 생각한다. 어떤 일회성의 사건도, 이루어내야만 하는 어떤 성취가 아닌, 말 그대로 ‘여정’이라는 단어가 내가 견지해 온 신앙을 가장 잘 설명한다고 생각한다. 결과가 아닌 과정이라는 것. 끊임없이 길 위에 있는 것. 그리고 그 길 위에서 늘 깨어 있으면서 맞이하게 될 수밖에 없는 변화의 기로들이 바로 회심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마커스는 대학에서 전공을 바꾸면서까지 회심을 경험했다고 한다. 첫 번째는 대학에서 ‘그리스도교 교리’라는 과목을 들으면서 지적 열정을 갖게 되면서 삶을 바라보는 단 하나의 올바른 방식이 있다는 관념이 사라지고, 해방감과 함께 그리스도교의 다양성과 풍요로움뿐만 아니라 지적 다양성의 세계를 알게 되었다고 한다. 나 역시 서른 후반에 겪었던 회심에서 비슷한 경험을 했다. 내가 유일한 진리로 의심 없이 믿던 것들이 그저 여러 입장 혹은 의견 중 하나일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서 아집의 우물로부터 가까스로 탈출할 수 있었다. 다양성은 반진리적이거나 비 복음적이지 않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것들의 기본에는 다양성이 있다. 생명의 다양성만을 떠올려보아도 이를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물론, 이건 하나의 예에 불과할 테지만.
마커스가 경험한 두 번째 회심 역시 지적인 측면이었다. 아모스서를 읽다가 일종의 계시 같은 경험을 했다고 한다. 이 세상을 더욱 정의로운 세상으로 변혁시키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열정, 갈망, 꿈, 바람에 관해서 새롭게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전에는 그저 여러 선지서 중 하나로만 알던 책일 뿐이었으나, 마커스에게 아모스서는 성서와 정치가 얼마나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보여 주는 사례였고, 성서가 얼마나 강하게 경제 정의를 열망하는지를 생생하게 보여 주는 책이었다.
마커스 앞의 두 번의 회심이 지적 활동을 통해 일어난 것이라면, 세 번째 회심은 그것과는 달리 소위 ‘신비 체험’이라 할 수 있는 경험을 통해 촉발되었다고 한다. 그는 홀연히 빛이 황금빛으로 변하는 순간을 마주할 수 있었고, 그 순간 모든 것이 경이로워 보이는 체험을 했다. 그는 압도되었고 의식 속에서 주객의 구분이 사라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고 서술한다. 머리로 아는 게 아니라 몸으로 체험을 했던 것이다. 그는 보았고 느꼈다. 그리고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물론 그가 신비주의를 신봉하거나 그것에 의지하는 건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는 창조주 하나님은 신비하시다. 신비한 존재를 체험하는 순간은 인간의 지성과 경험을 초월하는 방식으로 다가오기 마련이다. 하나님의 실재하심을 결코 지성적으로만 알 수는 없다. 하나님이 우리의 지성 안에 갇혀 계신 분이 아니시기 때문이다. 마커스 또한 신비 체험을 통해 하나님의 실재하심을 확신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가 그 순간 느낀 건 경이였다. 그는 말한다. 경이는 그리스도교인으로서의 여정을 형성한 가장 중요한 확신이라고. 하나님은 만물을 살게 하고, 움직이게 하며, 존재하게 하는 만물 그 이상의 분이시라고 담담히 고백한다. 그리고 덧붙인다. 이 책의 중심이 되고 기초가 되는 확신은 하나님이 실재하신다는 것, 그리고 성서와 그리스도교는 하나님, 곧 만물 그 이상의 분, 존재 그 자체와의 관계에 관한 이야기라고.
마커스는 이어서 구원에 대한 전통적인 해석과 결이 다른, 그래서 근본주의적 보수 신앙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자칫 ‘위험한’ 발상으로 여겨질 수도 있는 이야기를 전개한다. 한 마디로 구원은 내세보다 지금, 여기에서의 삶에 관한 것이라는 것. 나 역시 대한예수교 장로교 합동 측에서 신앙을 처음 가져서인지 오랫동안 구원은 죽어서 가는 천국 티켓을 받는 게 주목적이었다. 그러나 약 십 년 전 인생의 낮은 점을 지날 무렵 신앙의 재정립을 하며 마커스와 같은 결의 해석을 접하게 되었고, 그 이후 하나님 나라와 예수의 복음에 대한 이해가 더욱 깊어지고 풍성해짐을 체험할 수 있었다. 마커스는 말한다. 성서가 말하는 구원이 내세에 관한 것인 경우는 드물고, 대부분 이생에서의 변화에 관한 것이라고. 구원이란 우리가 죽은 뒤 천국에 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금, 여기의 삶이 변화하는데 필요한 것이라고. 사실 마커스가 간파한 대로 공관복음에서 예수가 전한 이야기의 핵심은 ‘죽어서 어떻게 천국에 갈 것인가’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였다. 바울 역시 내세의 천국이 아닌 지금, 여기에서의 새로운 삶이 변화되는 것, 즉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삶에 대해 강조했다. 죽어서 가는 천국은 결코 구원과 동의어가 될 수 없는 것이다. 우리가 육신을 가진 상태로 살아가는 지금, 여기에서 복음으로 말미암아 변화를 경험하지 못한다면, 구원은 그저 허상 혹은 망상에 머물지도 모른다. 마커스의 말은 옳다. 구원은 해방이며, 다시 연결되는 것이며, 새롭게 보는 것이며, 받아들여지는 것이며, 우리 안의 가장 깊은 갈망이 충족되는 것이다.
다음으로 마커스는 성서무오설의 허점을 짚으며 성서의 규범은 예수라고 강조한다. 마커스가 지적한 것처럼 성서무오설은 개신교, 그 안에서도 특정 분파에서, 최근에 형성된 교리다. 로마 가톨릭교회, 그리고 동방 정교회, 그리고 역사 속 대다수 교회에서는 한 번도 성서가 무오하다고 가르친 적이 없다. '오직 성서'라는 표어에도 불구하고, 루터는 성서가 그리스도교인의 삶에서 유일무이한 권위가 있다고 보지는 않았다. 그는 분명한 이성도 함께 강조했다. 따라서 성서의 무오성, 성서의 절대 권위라는 생각은 종교개혁 이후 등장한 개신교 신학의 발명품이다. 성서가 무오하다는 표현은 17세기 후반 개신교 신학 저작들에서 처음 등장한다. 마커스의 강조대로 나 역시 성서 무오설을 신앙의 핵심으로 여기는 건 성서를 예수보다 신봉하여 우상으로 만드는 행위라고 생각한다. 성서는 성령의 영감으로 인간이 쓴 저작물이다.
또한 성서는 시공간의 제한을 받는 인간을 통해 쓰였기 때문에 그것이 쓰인 역시 고대 근동이라는 시대와 문화의 제한을 받을 수밖에 없다. 성서는 우리에게 쓰인 게 아니라 우리를 위해 쓰인 것이다. 그러므로 시대와 문화가 바뀌면서 성서를 이루는 문자들은 성서가 말하는 진리를 모두 담아내지 못한다. 그러나 이것은 문자의 한계이지 성서의 한계가 아니다. 성서의 진리는 문자에 갇히지 않고, 문자를 넘어서는 의미를 가진다. 성서를 읽을 땐 비유적 의미를 반드시 물어야 한다는 마커스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비유적 해석은 이야기 속 사건이 실제로 일어났는지를 믿는 데 강조점을 두지 않고, 그 이야기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보고 받아들이는 데 무게를 두는 것이다. 나는 마커스의 다음 문장에 ‘아멘’을 외치며 밑줄을 진하게 그었다. “믿음이란 실제로 일어났을 법하지 않아 보여도 이야기의 사실성을 믿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믿음은 훨씬 더 중요한 무언가와 관련이 있다. 믿음은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에 관한 것이다. 믿음은 하느님을 삶의 중심에 두고 살아가는 것이며, 그분에게 충실하고, 그분을 신뢰하는 것이다. 믿음은 오만한 자기 확신도, 불안한 자기 의심도 아니다. 믿음은 깊은 평온함 가운데 하느님을 신뢰하는 것이다.” 성서는 문자적으로 사실이 아니어도 참일 수 있다. 성서의 주요 이야기들과 주제가 사실이든 아니든 상관없이 진리라는 데 나 역시 확신을 가진다.
예수의 십자가 죽음에 대한 마커스의 통찰은 전통적인 관점, 즉 우리의 죗값을 치르기 위함이라는 ‘대속’ 개념에 국한되지 않는다. 이 부분 또한 근본주의적 보수 신앙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에겐 ‘불편한’ 해석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마커스의 설명은 들어볼 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다. 먼저 ‘대속’은 1098년 수도사이자 사제, 수도원장이자 캔터베리 대주교였던 안셀무스가 처음으로 체계화한 개념이다. 신학사에서의 새로운 발명품이라는 것이다. 동방 그리스도교에서 대속은 별다른 비중을 차지하지 않는다고 한다. 안셀무스는 영주와 봉신 관계를 하나님과 인간관계에 적용했다고 한다. 하나님께서 아무런 대가 없이 인간의 죄를 용서하신다면, 사람들은 하나님이 죄를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으신다고 여길 것이라는 논리였다. 반드시 대가는 치러야 했다. 같은 논리로 예수의 성육신과 죽음은 그래서 필요하다고 결론이 지어진 것이었다. 그는 인간이 되신 하느님이었기 때문에 죄 없는 삶을 살 수 있었고, 우리를 대신해 죗값을 치를 수 있기 때문이었다.
마커스는 예수의 죽음을 대속만으로 이해하면 다음과 같은 신학적 문제들이 발생한다고 말한다. 첫째, 하느님께서 예수의 죽음을 계획하신 것처럼 생각하게 만든다. 둘째, 하나님이 불순종에 대가를 치르게 하시는 전제군주로 이해하게 만든다. 셋째, 예수의 죽음만 강조하게 되어 죽기 전 그의 삶과 가르침과 활동의 중요성을 가리게 된다. 넷째, 우리가 믿는 것이 따르는 것보다 중요하게 만든다.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을 예수가 대신해 주었다고 믿는 것이 되어버린다. 이 네 가지 문제들은 충분히 납득할 만하며, 나는 마커스의 견해에 동의가 된다. 사복음서에를 수십 번 읽어보고 목사님으로부터 설교도 수없이 들어왔지만, 예수 복음의 핵심은 하나님 나라였으며, 그 하나님 나라는 내세가 아니었고, 그의 가르침은 천국에 가는 법이 아닌 지금 이 땅에서의 삶이 어떻게 달라져야 하는지는 가리키는 말이었다. 우리가 예수의 제자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하는 논리 저번에도 예수가 살아낸 삶이 있는 것이지 않은가. 예수의 탄생과 죽음만으로 예수의 복음을 이해한다면 많은 것들을 놓치게 될 것이다.
마커스는 예수의 죽음을 대속으로만 이해하는 관점은 예수의 삶과 죽음,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를 다시 살리신 사건이 지닌 정치적 의미를 가릴 뿐 아니라 아예 지워버린다고 강조한다. 그리고 눈여겨보아야 할 부분은 예수가 우리의 죄를 위해, 우리를 대신해 죽는다는 것이 아니라 그를 위협으로 여긴 권력자들이 그를 죽이려 했다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렇게 쓴다. “누군가가 들으면 놀랄지도 모르겠지만, 어떤 복음서도 예수가 우리의 죗값을 치르기 위해 죽었다고 가르치지 않는다.” 나는 이 또한 동의가 되었다. 복음은 단순히 내면의 평안이나 영혼 구원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개인 구원만을 위한 목적이 아니었다. 복음은 제국에 맞서 세상이 어떠한 모습이어야 하는지를 이야기하는 전망이자 꿈이었다는 마커스의 말은 이런 점에서 지극히 옳다.
마커스 보그라는 신학자 덕분에 그리스도교 신앙과 신학에 대한 깊고 풍성한 통찰을 얻는다. 성서는 정치적이라는 말이 어떤 의미인지 조금 더 구체적으로 깨닫는 계기가 되었다. 예수의 제자라는 말이 담고 있는 함의 역시 정치적이라는 관점을 빼고서는 결코 다 이해할 수 없다는 결론도 얻게 된다. 그의 다른 책, ‘기독교의 심장’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기대가 된다.
한국 교회를 비추는 거울, 《마커스 보그의 고백》
글ㅣ최현기
포도나무교회 목사
목회자모임 멤버
1. 기독교의 ‘확신’에 관한 책
'마커스 보그의 고백'은 한국어 제목과 달리, 원제 Conviction이 상징하는 ‘현재의 신앙적 확신에 이르는 여정’을 정리한 기록이다. 저자는 자신이 어떻게 관습적인 기독교로부터 변화되어 현재의 확신을 갖게 됐는지, 그리고 이 확신에 이르는 여정을 어떻게 걸어 왔는지에 관해 기록했다. 목차를 들여다보면 그것이 단순히 개인적인 삶의 생각이 아닌 기독교의 핵심 주제들에 대한 신학 정리임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마커스 보그의 고백’은 저자가 기독교인으로서 그리고 신학자로서 살아온 자신의 삶에 대한 '기억'과 '회심' 그리고 그 여정 끝에 도달한 '확신'에 관한 책이자 동시에 개신교 전체에 대한 회심을 다룬 책이다.
2. 저자의 경험 - 기억, 회심, 그리고 확신
그의 이야기는 미국이라는 특정 환경에서 기독교인으로 살아온 배경하에 펼쳐진다. 그래서 책을 읽다 보면 현재 미국의 기독교 상황을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이 많이 담겨 있다. 비록 책의 배경은 미국 기독교지만 그가 겪은 신앙의 위기와 회심의 과정은 현재 한국의 기독교가 직면한 지적, 영적 정체성 위기와 정확히 맞닿아 있다. 그런 점에서 한국 독자들은 이 책을 읽으면 많은 부분 공감하게 될 것이다.
저자는 전형적인 미국 기독교인으로, 소위 '온건 문자주의자'로 자랐지만, 후에 회심의 과정을 겪었다. 저자는 이 회심이 세 가지 측면, 즉 지적, 정치적, 종교적 측면에서 일어났고, 그 회심의 과정을 통해 진보 기독교인이 되었다. 이 회심의 과정은 극적이기보다 점진적이었고 점층적이었기에 회심 이후의 확신은 저자를 매우 견고하게 만들어 주었다. 저자가 말하는 회심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비신자에서 신자로의 전환이 아닌, 성서와 하나님, 예수,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중대한 변화를 말한다. 사실 이 회심이야말로 현재 우리 한국 교회 안에 필요한 것이다.
개인적으로 필자 또한 이러한 지적, 정치적, 종교적 회심의 과정을 겪었기에 저자의 회심이 무척이나 반가웠다. 특히 그의 회심에 큰 영향을 미친 것이 신비체험이었다는 사실이 인상적이었다. 신학자로서 다분히 이성과 지성을 우선시할 수 있지만 자신이 경험한 신비체험을 부인할 수 없었던 그는, 자신의 체험을 신학자답게 논리적으로 정리했고, 성경적 근거로 설명해 나감으로써 그의 ‘확신’을 보다 견고하게 해주었다.
무엇보다 이런 신비체험은 하나님을 이해하는 방식에 변화를 불러왔다. 이는 자신의 학문과 지식을 맹신하지 않게 해 주었을 뿐 아니라, 겸손한 신앙인이 되게 해 주었다. 이후 그가 '확신'하게 된 여러 신학적 지식은 모두 이 바탕 위에 있다. 이런 면에서 그의 하나님에 대한 앎은 이론적인 것이 아니라 경험적이며 실존적이다.
3. 저자의 ‘확신’들, 그리고 삶의 적용
책의 본론에서 저자는 회심한 이후 확신을 갖게 된 지식을 정리해 놓았다. 그는 구원, 하나님에 대한 지식, 예수에 대한 이해, 성서에 대한 관점,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해 기존 교회의 협소한 관점으로부터 자신이 변화된 부분을 짧지만 핵심적으로 잘 소개한다.
저자는 구원을 단지 천국에 가는 것으로 생각한다면 성서 속 구원의 의미를 극단적으로 축소하는 것이라 말한다. 저자는 구원이란 이생에서의 ‘변화’를 말하며, 기존 삶의 방식에서 다른 방식으로 변화하게 되는 것이라 주장한다. 따라서 구원은 개인의 영혼 변화에 국한되지 않고, 보다 총체적으로 정치, 경제적인 차원에서까지 미친다.
마찬가지로 예수를 따른다는 것도 단지 대속을 믿는 것만이 아닌, 현재의 권력자들과 맞서며 자기 변혁의 길에 들어서는 것을 의미한다. 전통적인 관점에서 볼 때 이런 저자의 주장은 대속적 구원을 과도하게 약화시킬 수 있다는 비판을 받을 만하다. 죽음 이후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에 관해 자신은 불가지론자라고 말한 점은 저자의 솔직한 고백일 수는 있으나 신학적으로는 내세에 대한 확신을 약화시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궁극적인 목적을 흐리게 할 수 있다는 우려를 낳을 수 있다. 현세적 사회 윤리적 관점에 과하게 치중하게 됨으로써 기독교 신앙의 본질인 ‘종말론적 신앙’이 퇴색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비판 말이다. 하지만 대속의 구원에만 머물러 이생에서의 삶에 대해 위선적인 행태를 보여온 현대 교회는 저자의 구원관에 대해 진지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어 나오는 저자의 성서 해석에 대한 입장과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관점도 앞선 구원관, 제자도와 맥을 같이 한다. 정치 경제 사회 분야를 보다 총체적이고 진보적인 관점으로 바라보고 있으며, 이는 자연스럽게 독자로 하여금 사회를 향해 진보적인 행동을 하도록 촉구하게 한다.
특별히 ‘아모스와 미국 그리스도교’의 내용은 이러한 총체적인 관점이 어떻게 적용되어야 하는 지를 잘 보여준다. 오늘날 미국 정치와 기독교는 개인주의와 미국 예외주의(미국이 세계에서 가장 위대하고 훌륭하며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나라라고 믿는 사상)에 영향을 받고 있는데, 아모스를 비롯한 성서의 인물들은 한결같이 이런 행태를 강하게 비판하며 고발하고 있음을 역설한다. 저자는 미국의 이런 태도는 매우 교만한 것이며 오늘날 성서의 예언자들이 출현했다면, 분명 똑같이 경고하며 변화를 촉구했을 것이라 말한다.
@Unsplash, Михаил Секацкий
4. 세 가지 인식 단계와 현재 한국 교회의 모습
저자는 그리스도인에게 세 가지 인식 단계가 있음을 설명한다; ‘비판 이전의 순진 단계’, ‘비판적 사고 단계’, 그리고 ‘비판 이후의 긍정 단계’. 이 중 두 번째 ‘비판적 사고의 단계’는 주체적으로 신앙을 성찰하는 단계인데, 이 단계를 지나야 비로소 영적 성인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세 가지 인식의 단계를 현재 한국 기독교에 적용해 보면, 많은 한국 그리스도인의 모습은 이 ‘비판적 사고의 단계’가 결여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안타깝지만 몸집은 커져 어른처럼 보이나 여전히 ‘비판 이전의 순진 단계’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 ‘영적 성인 아이’의 모습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5. 지적이면서도 감성적인 책
책은 지적이면서도 감성적이다. 독자에게 풍부한 지식을 제공하면서도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감동을 준다. 이는 저자가 성서에 대한 깊은 이해뿐 아니라 실존적으로 하나님을 아는 과정을 겪었기 때문일 것이다.
저자는 이 책을 세상을 떠나기 1년 전에 출간했다. 평생에 걸친 신학과 신앙에 대한 확신을 마지막으로 정리한 유언과 같은 책이라 할 수 있다. 책을 읽으며 그가 도달한 확신 자체에도 많은 도움을 받았지만, 이런 자기 확신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많은 내적, 외적 진통이 있었을지를 상상하게 되니 새삼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여정의 무게를 느끼게 되었다.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책을 읽으며 갖게 된 소망은 필자도 저자의 나이가 되었을 때, 이러한 ‘확신’을 갖고 자신의 믿는 바를 말할 수 있으면 하는 것이다. 기억에서 회심을 지나 얻게 된 굳은 확신 말이다.
11 · 12월 독후감 공모 도서

기독교, 우리가 숨 쉬는 공기
글렌 스크리브너 저, 박세혁 옮김 ㅣ IVP ㅣ2025
출판사 책소개
오늘날 서구 사회의 많은 이들이 교회가 죽어 간다고 진단한다. 기독교는 시대에 뒤처지고, 편협하며, 사회의 여러 문제에 책임이 있다고 여겨진다. 이런 상황 때문에 교회를 떠나는 이들도 있고, 외부에서는 기독교를 회의적으로 바라본다. 하지만 기독교의 메시지가 현대 사회가 자랑스러워하고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를 형성해 온 원천이라면 어떨까?
🌟 이달의 독후감으로 선정된 분에게는 커피 쿠폰을 감사 선물로 보내드립니다.
🌟 원고 접수 : 과신대 편집팀 scitheoeditor@gmail.com
이달의 독후감
마커스 보그의 고백
- 기억에서 회심으로, 그리고 확신으로
마커스 J. 보그 지음, 민경찬 · 손승우 옮김ㅣ비아 ㅣ2025
"두 달간 마커스 보그의 이야기를 함께 읽으며 깊은 생각과 마음을 나눠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 책에서도 함께해요🙌" - 과신뷰 편집팀
* 선정된 독후감은 제목 가나다 순으로 게시하였습니다. 다음 달 선정 도서는 게시글 마지막에서 확인해 주세요. 😉
진리의 여정, 경이의 신앙
마커스 보그 저,《마커스 보그의 고백》을 읽고
글ㅣ김영웅
기초과학연구원 유전체교정연구단 선임연구원
과신대 정회원, 후원이사
이 책은 70년이란 세월을 살아낸 마커스 보그가 그의 ‘기억’, 그가 경험한 세 가지 측면에서의 ‘회심’, 그리고 그 여정에서 얻은 ‘확신’이라는 세 가지 키워드로 삶을 돌아보며 그리스도교 신앙과 신학에 관련된 생각을 정리한 역작이다. 삶을 진지하게 성찰하고 치열하게 살아온 사람이라면, 특히 그 사람이 나이가 지긋이 든 경우라면, 내겐 우선적인 경청의 대상이 된다. 나는 근본주의적 보수 신앙을 가진 채 시대의 조류와 어쩌다 맞아떨어져 연예인처럼 부와 명예와 힘을 거머쥐고 화려한 인생을 살다가 추하게 늙어버린 목회자들과 신학자들을 여럿 알고 있다. 그들의 말과 글은 공허하여 더 이상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진리라면 시대가 변해도 변함없이 진리여야 한다는 믿음이 내게 있기 때문일 것이다. 진정한 어른, 진정한 믿음의 선진들이 희박해진 이 시대에 마커스 보그라는 존재는 빛나는 옥석이 아닐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일까. 이 책이 나오자마자 나는 손에 넣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마커스 보그가 이 책에서 사용하는 주요한 단어와 문장들에 마음을 빼앗겨버렸다. 신앙은 여정이라는 것, 회심은 갑작스럽고 극적일 수도 있지만 점진적이고 점층적인 경우가 더 많다는 것, 하나님은 실재하며 신비하다는 것, 그리스도교인이 된다는 건 올바른 신념, 지적으로 정확한 신학을 갖는 것만이 아니라는 것, 경이야말로 그리스도교인으로서의 여정을 형성하는 중요한 확신일 수 있다는 것, 구원은 내세보다 여기에서의 삶에 관한 기쁜 소식이라는 것, 성서는 문자적으로 사실이 아니어도 참일 수 있다는 것, 예수의 죽음을 대속만으로 이해하면 여러 신학적 문제가 발생한다는 것, 복음은 단순히 내면의 평안이나 영혼 구원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 복음은 제국에 맞서 세상이 어떠한 모습이어야 하는지를 이야기하는 전망이자 꿈이었다는 것, 그래서 성서는 정치적이라는 것, 등의 메시지가 내 머릿속과 마음판에 견고하게 박혔다. 하나씩 간단하게 살펴보자.
먼저, 신앙은 여정이라는 말에서 나는 내가 언젠가부터 좋아하게 된 ‘여정’이라는 단어에 끌렸다. 그렇다. 나는 인생도 그렇지만 신앙 역시 여정이라 생각한다. 어떤 일회성의 사건도, 이루어내야만 하는 어떤 성취가 아닌, 말 그대로 ‘여정’이라는 단어가 내가 견지해 온 신앙을 가장 잘 설명한다고 생각한다. 결과가 아닌 과정이라는 것. 끊임없이 길 위에 있는 것. 그리고 그 길 위에서 늘 깨어 있으면서 맞이하게 될 수밖에 없는 변화의 기로들이 바로 회심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마커스는 대학에서 전공을 바꾸면서까지 회심을 경험했다고 한다. 첫 번째는 대학에서 ‘그리스도교 교리’라는 과목을 들으면서 지적 열정을 갖게 되면서 삶을 바라보는 단 하나의 올바른 방식이 있다는 관념이 사라지고, 해방감과 함께 그리스도교의 다양성과 풍요로움뿐만 아니라 지적 다양성의 세계를 알게 되었다고 한다. 나 역시 서른 후반에 겪었던 회심에서 비슷한 경험을 했다. 내가 유일한 진리로 의심 없이 믿던 것들이 그저 여러 입장 혹은 의견 중 하나일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서 아집의 우물로부터 가까스로 탈출할 수 있었다. 다양성은 반진리적이거나 비 복음적이지 않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것들의 기본에는 다양성이 있다. 생명의 다양성만을 떠올려보아도 이를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물론, 이건 하나의 예에 불과할 테지만.
마커스가 경험한 두 번째 회심 역시 지적인 측면이었다. 아모스서를 읽다가 일종의 계시 같은 경험을 했다고 한다. 이 세상을 더욱 정의로운 세상으로 변혁시키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열정, 갈망, 꿈, 바람에 관해서 새롭게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전에는 그저 여러 선지서 중 하나로만 알던 책일 뿐이었으나, 마커스에게 아모스서는 성서와 정치가 얼마나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보여 주는 사례였고, 성서가 얼마나 강하게 경제 정의를 열망하는지를 생생하게 보여 주는 책이었다.
마커스 앞의 두 번의 회심이 지적 활동을 통해 일어난 것이라면, 세 번째 회심은 그것과는 달리 소위 ‘신비 체험’이라 할 수 있는 경험을 통해 촉발되었다고 한다. 그는 홀연히 빛이 황금빛으로 변하는 순간을 마주할 수 있었고, 그 순간 모든 것이 경이로워 보이는 체험을 했다. 그는 압도되었고 의식 속에서 주객의 구분이 사라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고 서술한다. 머리로 아는 게 아니라 몸으로 체험을 했던 것이다. 그는 보았고 느꼈다. 그리고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물론 그가 신비주의를 신봉하거나 그것에 의지하는 건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는 창조주 하나님은 신비하시다. 신비한 존재를 체험하는 순간은 인간의 지성과 경험을 초월하는 방식으로 다가오기 마련이다. 하나님의 실재하심을 결코 지성적으로만 알 수는 없다. 하나님이 우리의 지성 안에 갇혀 계신 분이 아니시기 때문이다. 마커스 또한 신비 체험을 통해 하나님의 실재하심을 확신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가 그 순간 느낀 건 경이였다. 그는 말한다. 경이는 그리스도교인으로서의 여정을 형성한 가장 중요한 확신이라고. 하나님은 만물을 살게 하고, 움직이게 하며, 존재하게 하는 만물 그 이상의 분이시라고 담담히 고백한다. 그리고 덧붙인다. 이 책의 중심이 되고 기초가 되는 확신은 하나님이 실재하신다는 것, 그리고 성서와 그리스도교는 하나님, 곧 만물 그 이상의 분, 존재 그 자체와의 관계에 관한 이야기라고.
마커스는 이어서 구원에 대한 전통적인 해석과 결이 다른, 그래서 근본주의적 보수 신앙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자칫 ‘위험한’ 발상으로 여겨질 수도 있는 이야기를 전개한다. 한 마디로 구원은 내세보다 지금, 여기에서의 삶에 관한 것이라는 것. 나 역시 대한예수교 장로교 합동 측에서 신앙을 처음 가져서인지 오랫동안 구원은 죽어서 가는 천국 티켓을 받는 게 주목적이었다. 그러나 약 십 년 전 인생의 낮은 점을 지날 무렵 신앙의 재정립을 하며 마커스와 같은 결의 해석을 접하게 되었고, 그 이후 하나님 나라와 예수의 복음에 대한 이해가 더욱 깊어지고 풍성해짐을 체험할 수 있었다. 마커스는 말한다. 성서가 말하는 구원이 내세에 관한 것인 경우는 드물고, 대부분 이생에서의 변화에 관한 것이라고. 구원이란 우리가 죽은 뒤 천국에 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금, 여기의 삶이 변화하는데 필요한 것이라고. 사실 마커스가 간파한 대로 공관복음에서 예수가 전한 이야기의 핵심은 ‘죽어서 어떻게 천국에 갈 것인가’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였다. 바울 역시 내세의 천국이 아닌 지금, 여기에서의 새로운 삶이 변화되는 것, 즉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삶에 대해 강조했다. 죽어서 가는 천국은 결코 구원과 동의어가 될 수 없는 것이다. 우리가 육신을 가진 상태로 살아가는 지금, 여기에서 복음으로 말미암아 변화를 경험하지 못한다면, 구원은 그저 허상 혹은 망상에 머물지도 모른다. 마커스의 말은 옳다. 구원은 해방이며, 다시 연결되는 것이며, 새롭게 보는 것이며, 받아들여지는 것이며, 우리 안의 가장 깊은 갈망이 충족되는 것이다.
다음으로 마커스는 성서무오설의 허점을 짚으며 성서의 규범은 예수라고 강조한다. 마커스가 지적한 것처럼 성서무오설은 개신교, 그 안에서도 특정 분파에서, 최근에 형성된 교리다. 로마 가톨릭교회, 그리고 동방 정교회, 그리고 역사 속 대다수 교회에서는 한 번도 성서가 무오하다고 가르친 적이 없다. '오직 성서'라는 표어에도 불구하고, 루터는 성서가 그리스도교인의 삶에서 유일무이한 권위가 있다고 보지는 않았다. 그는 분명한 이성도 함께 강조했다. 따라서 성서의 무오성, 성서의 절대 권위라는 생각은 종교개혁 이후 등장한 개신교 신학의 발명품이다. 성서가 무오하다는 표현은 17세기 후반 개신교 신학 저작들에서 처음 등장한다. 마커스의 강조대로 나 역시 성서 무오설을 신앙의 핵심으로 여기는 건 성서를 예수보다 신봉하여 우상으로 만드는 행위라고 생각한다. 성서는 성령의 영감으로 인간이 쓴 저작물이다.
또한 성서는 시공간의 제한을 받는 인간을 통해 쓰였기 때문에 그것이 쓰인 역시 고대 근동이라는 시대와 문화의 제한을 받을 수밖에 없다. 성서는 우리에게 쓰인 게 아니라 우리를 위해 쓰인 것이다. 그러므로 시대와 문화가 바뀌면서 성서를 이루는 문자들은 성서가 말하는 진리를 모두 담아내지 못한다. 그러나 이것은 문자의 한계이지 성서의 한계가 아니다. 성서의 진리는 문자에 갇히지 않고, 문자를 넘어서는 의미를 가진다. 성서를 읽을 땐 비유적 의미를 반드시 물어야 한다는 마커스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비유적 해석은 이야기 속 사건이 실제로 일어났는지를 믿는 데 강조점을 두지 않고, 그 이야기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보고 받아들이는 데 무게를 두는 것이다. 나는 마커스의 다음 문장에 ‘아멘’을 외치며 밑줄을 진하게 그었다. “믿음이란 실제로 일어났을 법하지 않아 보여도 이야기의 사실성을 믿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믿음은 훨씬 더 중요한 무언가와 관련이 있다. 믿음은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에 관한 것이다. 믿음은 하느님을 삶의 중심에 두고 살아가는 것이며, 그분에게 충실하고, 그분을 신뢰하는 것이다. 믿음은 오만한 자기 확신도, 불안한 자기 의심도 아니다. 믿음은 깊은 평온함 가운데 하느님을 신뢰하는 것이다.” 성서는 문자적으로 사실이 아니어도 참일 수 있다. 성서의 주요 이야기들과 주제가 사실이든 아니든 상관없이 진리라는 데 나 역시 확신을 가진다.
예수의 십자가 죽음에 대한 마커스의 통찰은 전통적인 관점, 즉 우리의 죗값을 치르기 위함이라는 ‘대속’ 개념에 국한되지 않는다. 이 부분 또한 근본주의적 보수 신앙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에겐 ‘불편한’ 해석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마커스의 설명은 들어볼 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다. 먼저 ‘대속’은 1098년 수도사이자 사제, 수도원장이자 캔터베리 대주교였던 안셀무스가 처음으로 체계화한 개념이다. 신학사에서의 새로운 발명품이라는 것이다. 동방 그리스도교에서 대속은 별다른 비중을 차지하지 않는다고 한다. 안셀무스는 영주와 봉신 관계를 하나님과 인간관계에 적용했다고 한다. 하나님께서 아무런 대가 없이 인간의 죄를 용서하신다면, 사람들은 하나님이 죄를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으신다고 여길 것이라는 논리였다. 반드시 대가는 치러야 했다. 같은 논리로 예수의 성육신과 죽음은 그래서 필요하다고 결론이 지어진 것이었다. 그는 인간이 되신 하느님이었기 때문에 죄 없는 삶을 살 수 있었고, 우리를 대신해 죗값을 치를 수 있기 때문이었다.
마커스는 예수의 죽음을 대속만으로 이해하면 다음과 같은 신학적 문제들이 발생한다고 말한다. 첫째, 하느님께서 예수의 죽음을 계획하신 것처럼 생각하게 만든다. 둘째, 하나님이 불순종에 대가를 치르게 하시는 전제군주로 이해하게 만든다. 셋째, 예수의 죽음만 강조하게 되어 죽기 전 그의 삶과 가르침과 활동의 중요성을 가리게 된다. 넷째, 우리가 믿는 것이 따르는 것보다 중요하게 만든다.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을 예수가 대신해 주었다고 믿는 것이 되어버린다. 이 네 가지 문제들은 충분히 납득할 만하며, 나는 마커스의 견해에 동의가 된다. 사복음서에를 수십 번 읽어보고 목사님으로부터 설교도 수없이 들어왔지만, 예수 복음의 핵심은 하나님 나라였으며, 그 하나님 나라는 내세가 아니었고, 그의 가르침은 천국에 가는 법이 아닌 지금 이 땅에서의 삶이 어떻게 달라져야 하는지는 가리키는 말이었다. 우리가 예수의 제자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하는 논리 저번에도 예수가 살아낸 삶이 있는 것이지 않은가. 예수의 탄생과 죽음만으로 예수의 복음을 이해한다면 많은 것들을 놓치게 될 것이다.
마커스는 예수의 죽음을 대속으로만 이해하는 관점은 예수의 삶과 죽음,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를 다시 살리신 사건이 지닌 정치적 의미를 가릴 뿐 아니라 아예 지워버린다고 강조한다. 그리고 눈여겨보아야 할 부분은 예수가 우리의 죄를 위해, 우리를 대신해 죽는다는 것이 아니라 그를 위협으로 여긴 권력자들이 그를 죽이려 했다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렇게 쓴다. “누군가가 들으면 놀랄지도 모르겠지만, 어떤 복음서도 예수가 우리의 죗값을 치르기 위해 죽었다고 가르치지 않는다.” 나는 이 또한 동의가 되었다. 복음은 단순히 내면의 평안이나 영혼 구원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개인 구원만을 위한 목적이 아니었다. 복음은 제국에 맞서 세상이 어떠한 모습이어야 하는지를 이야기하는 전망이자 꿈이었다는 마커스의 말은 이런 점에서 지극히 옳다.
마커스 보그라는 신학자 덕분에 그리스도교 신앙과 신학에 대한 깊고 풍성한 통찰을 얻는다. 성서는 정치적이라는 말이 어떤 의미인지 조금 더 구체적으로 깨닫는 계기가 되었다. 예수의 제자라는 말이 담고 있는 함의 역시 정치적이라는 관점을 빼고서는 결코 다 이해할 수 없다는 결론도 얻게 된다. 그의 다른 책, ‘기독교의 심장’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기대가 된다.
한국 교회를 비추는 거울, 《마커스 보그의 고백》
글ㅣ최현기
포도나무교회 목사
목회자모임 멤버
1. 기독교의 ‘확신’에 관한 책
'마커스 보그의 고백'은 한국어 제목과 달리, 원제 Conviction이 상징하는 ‘현재의 신앙적 확신에 이르는 여정’을 정리한 기록이다. 저자는 자신이 어떻게 관습적인 기독교로부터 변화되어 현재의 확신을 갖게 됐는지, 그리고 이 확신에 이르는 여정을 어떻게 걸어 왔는지에 관해 기록했다. 목차를 들여다보면 그것이 단순히 개인적인 삶의 생각이 아닌 기독교의 핵심 주제들에 대한 신학 정리임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마커스 보그의 고백’은 저자가 기독교인으로서 그리고 신학자로서 살아온 자신의 삶에 대한 '기억'과 '회심' 그리고 그 여정 끝에 도달한 '확신'에 관한 책이자 동시에 개신교 전체에 대한 회심을 다룬 책이다.
2. 저자의 경험 - 기억, 회심, 그리고 확신
그의 이야기는 미국이라는 특정 환경에서 기독교인으로 살아온 배경하에 펼쳐진다. 그래서 책을 읽다 보면 현재 미국의 기독교 상황을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이 많이 담겨 있다. 비록 책의 배경은 미국 기독교지만 그가 겪은 신앙의 위기와 회심의 과정은 현재 한국의 기독교가 직면한 지적, 영적 정체성 위기와 정확히 맞닿아 있다. 그런 점에서 한국 독자들은 이 책을 읽으면 많은 부분 공감하게 될 것이다.
저자는 전형적인 미국 기독교인으로, 소위 '온건 문자주의자'로 자랐지만, 후에 회심의 과정을 겪었다. 저자는 이 회심이 세 가지 측면, 즉 지적, 정치적, 종교적 측면에서 일어났고, 그 회심의 과정을 통해 진보 기독교인이 되었다. 이 회심의 과정은 극적이기보다 점진적이었고 점층적이었기에 회심 이후의 확신은 저자를 매우 견고하게 만들어 주었다. 저자가 말하는 회심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비신자에서 신자로의 전환이 아닌, 성서와 하나님, 예수,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중대한 변화를 말한다. 사실 이 회심이야말로 현재 우리 한국 교회 안에 필요한 것이다.
개인적으로 필자 또한 이러한 지적, 정치적, 종교적 회심의 과정을 겪었기에 저자의 회심이 무척이나 반가웠다. 특히 그의 회심에 큰 영향을 미친 것이 신비체험이었다는 사실이 인상적이었다. 신학자로서 다분히 이성과 지성을 우선시할 수 있지만 자신이 경험한 신비체험을 부인할 수 없었던 그는, 자신의 체험을 신학자답게 논리적으로 정리했고, 성경적 근거로 설명해 나감으로써 그의 ‘확신’을 보다 견고하게 해주었다.
무엇보다 이런 신비체험은 하나님을 이해하는 방식에 변화를 불러왔다. 이는 자신의 학문과 지식을 맹신하지 않게 해 주었을 뿐 아니라, 겸손한 신앙인이 되게 해 주었다. 이후 그가 '확신'하게 된 여러 신학적 지식은 모두 이 바탕 위에 있다. 이런 면에서 그의 하나님에 대한 앎은 이론적인 것이 아니라 경험적이며 실존적이다.
3. 저자의 ‘확신’들, 그리고 삶의 적용
책의 본론에서 저자는 회심한 이후 확신을 갖게 된 지식을 정리해 놓았다. 그는 구원, 하나님에 대한 지식, 예수에 대한 이해, 성서에 대한 관점,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해 기존 교회의 협소한 관점으로부터 자신이 변화된 부분을 짧지만 핵심적으로 잘 소개한다.
저자는 구원을 단지 천국에 가는 것으로 생각한다면 성서 속 구원의 의미를 극단적으로 축소하는 것이라 말한다. 저자는 구원이란 이생에서의 ‘변화’를 말하며, 기존 삶의 방식에서 다른 방식으로 변화하게 되는 것이라 주장한다. 따라서 구원은 개인의 영혼 변화에 국한되지 않고, 보다 총체적으로 정치, 경제적인 차원에서까지 미친다.
마찬가지로 예수를 따른다는 것도 단지 대속을 믿는 것만이 아닌, 현재의 권력자들과 맞서며 자기 변혁의 길에 들어서는 것을 의미한다. 전통적인 관점에서 볼 때 이런 저자의 주장은 대속적 구원을 과도하게 약화시킬 수 있다는 비판을 받을 만하다. 죽음 이후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에 관해 자신은 불가지론자라고 말한 점은 저자의 솔직한 고백일 수는 있으나 신학적으로는 내세에 대한 확신을 약화시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궁극적인 목적을 흐리게 할 수 있다는 우려를 낳을 수 있다. 현세적 사회 윤리적 관점에 과하게 치중하게 됨으로써 기독교 신앙의 본질인 ‘종말론적 신앙’이 퇴색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비판 말이다. 하지만 대속의 구원에만 머물러 이생에서의 삶에 대해 위선적인 행태를 보여온 현대 교회는 저자의 구원관에 대해 진지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어 나오는 저자의 성서 해석에 대한 입장과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관점도 앞선 구원관, 제자도와 맥을 같이 한다. 정치 경제 사회 분야를 보다 총체적이고 진보적인 관점으로 바라보고 있으며, 이는 자연스럽게 독자로 하여금 사회를 향해 진보적인 행동을 하도록 촉구하게 한다.
특별히 ‘아모스와 미국 그리스도교’의 내용은 이러한 총체적인 관점이 어떻게 적용되어야 하는 지를 잘 보여준다. 오늘날 미국 정치와 기독교는 개인주의와 미국 예외주의(미국이 세계에서 가장 위대하고 훌륭하며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나라라고 믿는 사상)에 영향을 받고 있는데, 아모스를 비롯한 성서의 인물들은 한결같이 이런 행태를 강하게 비판하며 고발하고 있음을 역설한다. 저자는 미국의 이런 태도는 매우 교만한 것이며 오늘날 성서의 예언자들이 출현했다면, 분명 똑같이 경고하며 변화를 촉구했을 것이라 말한다.
4. 세 가지 인식 단계와 현재 한국 교회의 모습
저자는 그리스도인에게 세 가지 인식 단계가 있음을 설명한다; ‘비판 이전의 순진 단계’, ‘비판적 사고 단계’, 그리고 ‘비판 이후의 긍정 단계’. 이 중 두 번째 ‘비판적 사고의 단계’는 주체적으로 신앙을 성찰하는 단계인데, 이 단계를 지나야 비로소 영적 성인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세 가지 인식의 단계를 현재 한국 기독교에 적용해 보면, 많은 한국 그리스도인의 모습은 이 ‘비판적 사고의 단계’가 결여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안타깝지만 몸집은 커져 어른처럼 보이나 여전히 ‘비판 이전의 순진 단계’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 ‘영적 성인 아이’의 모습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5. 지적이면서도 감성적인 책
책은 지적이면서도 감성적이다. 독자에게 풍부한 지식을 제공하면서도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감동을 준다. 이는 저자가 성서에 대한 깊은 이해뿐 아니라 실존적으로 하나님을 아는 과정을 겪었기 때문일 것이다.
저자는 이 책을 세상을 떠나기 1년 전에 출간했다. 평생에 걸친 신학과 신앙에 대한 확신을 마지막으로 정리한 유언과 같은 책이라 할 수 있다. 책을 읽으며 그가 도달한 확신 자체에도 많은 도움을 받았지만, 이런 자기 확신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많은 내적, 외적 진통이 있었을지를 상상하게 되니 새삼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여정의 무게를 느끼게 되었다.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책을 읽으며 갖게 된 소망은 필자도 저자의 나이가 되었을 때, 이러한 ‘확신’을 갖고 자신의 믿는 바를 말할 수 있으면 하는 것이다. 기억에서 회심을 지나 얻게 된 굳은 확신 말이다.
11 · 12월 독후감 공모 도서
기독교, 우리가 숨 쉬는 공기
글렌 스크리브너 저, 박세혁 옮김 ㅣ IVP ㅣ2025
출판사 책소개
오늘날 서구 사회의 많은 이들이 교회가 죽어 간다고 진단한다. 기독교는 시대에 뒤처지고, 편협하며, 사회의 여러 문제에 책임이 있다고 여겨진다. 이런 상황 때문에 교회를 떠나는 이들도 있고, 외부에서는 기독교를 회의적으로 바라본다. 하지만 기독교의 메시지가 현대 사회가 자랑스러워하고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를 형성해 온 원천이라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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