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 책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 『AI는 인간을 먹고 자란다』 / 마크 그레이엄 외 2명 지음 / 흐름출판 -
글 | 김양현
과신뷰 편집장
기독인문연구소 시시당 대표

박찬욱 감독의 영화 [어쩔수가없다]의 엔딩 장면은 섬뜩했다. 제지회사의 합병으로 인해 실직한 주인공 유만수는 새 회사에 입사하기 위해 잠재적 경쟁자들을 한 명씩 제거해 나간다. 자신이 살기 위해서 어쩔 수가 없었다. 우여곡절 끝에 그는 새 제지회사에 취직한다. 하지만 그에게 맡겨진 임무는 거대한 자동화 공장의 전원을 켜고 끄는 일이다. 인간끼리의 치열한 승부를 펼친 그가 기계에 밀려나는 꼴이라니.
AI의 시대가 우리 앞에 펼쳐지고 있다. 80년대 이후 닷컴 열풍이 불었고, 플랫폼 기업이 부상했다. 빌 게이츠, 제프 베이조스, 마크 주커버그, 스티브 잡스 등 신화적 인물들의 시대였다. 혁신의 아이콘, 천문학적인 연봉, 시대를 이끄는 우상의 등장이었다. 이제 그들의 시대가 저물고 샘 알트만으로 대표되는 AI 기업의 시대가 열린다.
AI (Artificial Intelligence)는 마치 신처럼 우리에게 전지전능하게 보인다. 모르는 것이 없고 대답하지 못하는 것이 없는 존재와 같다. 하지만 실제 인공지능은 기존의 데이터를 처리하여 결정, 예측, 추천하는 기계 기반 시스템이다. 최근 AI는 거대언어모델(Large Language Model)을 중심으로 빠르게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또한 AGI(Artificial General Intelligence), 피지컬 AI 등의 상용화로 인간 지능과 흡사한 시스템으로 발전하고 있다.

사진: Unsplash의 Growtika
이런 시대에 우리는 두 가지 염려를 한다. 하나는, SF 영화 터미네이터와 같이 기계 인간이 인류를 대체하거나 멸망시킬 것에 대한 두려움이고, 또 하나는 기계가 인간의 일자리를 대체하게 되면 인간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두려움이다. 전자가 오지 않은 미래적 두려움이라면 후자는 이미 진행형인 현재적 두려움이다.
실제로 AI의 도입으로 번역, 통역, 행정 보조 같은 업무 종사자들의 일자리가 점점 축소되고 있고, 변호사, 교수, 대학 집단 등의 직업군이 위기라는 진단을 하고 있다. 게다가 로봇이 물류센터와 공장에 투입됨으로 인간의 일자리가 점차 사라지고 있다. 자율주행 시스템의 발달은 장거리 운전사들을 대체하고 있다.
이 책 [AI는 인간을 먹고 자란다]의 공동저자들은 현재 진행형인 사례들을 추적하고 있다. 아프리카 데이터 센터의 직원들은 저임금 노동에 시달리고 있다. 실제로 AI는 데이터 싸움이기에 사람이 데이터를 지속적으로 주입해 주어야 한다. 그 작업을 수많은 데이터 센터 직원들이 감당하고 있다. 이들은 언제든지 대체될 수 있는 인력들이어서 열악한 노동 환경에 대한 저항을 하지 못한다.
아이슬란드의 데이터 센터는 AI의 전 지구적 연결망을 보여준다. 아이슬란드는 연간 온도가 0도에서 10도 사이를 유지하므로 데이터 센터가 들어서기에 좋은 입지 조건을 가지고 있다. 실제 런던이나 파리 등에 본사를 둔 기업들은 아이슬란드에 데이터 센터를 둠으로 인력 및 비용 절감 등 유리한 경영을 하게 된다. 전 지구적으로 설치된 광섬유 기반 케이블은 데이터의 신속하고 정확한 흐름을 유지할 수 있게 한다.
물론 이런 광케이블은 빅 테크 기업들의 독점 소유물이다. 이들은 케이블을 독점하고 정보를 점유함으로 막대한 이익을 취한다. 아마존 같은 기업들은 물류센터를 자동화함으로 비용을 절감할 뿐 아니라 단기 계약자들을 고용함으로 그들에게 최소한의 임금을 지불한다. 이런 비용 절감으로 기업의 CEO나 임원들은 천문학적인 수익을 나눠 가진다.
플랫폼 기업의 CEO 뿐 아니라 빅 테크를 이끄는 리더들은 겉으로는 진보적 사상을 말하고 인류의 공영을 이야기하지만, 실제 그들이 기업을 운영하는 방식은 독재에 가깝다. 그리고 대부분 이들은 백인 남성들이기에 백인 남성들의 정치적 사상을 드러내고 실제 인공지능 시스템도 그러한 정치적, 경제적 편향을 사용자에게 주입하고 있다.

사진: Unsplash의 Nguyễn Duy Hưng
그런데 이런 경향은 어디선가 본 듯하다. 기시감이 든다. 그렇다. 실제로 15세기 대항해 시대를 열었던 스페인, 포르투갈, 영국, 네덜란드 등의 열강이 사용했던 방식이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신대륙 진출 이후로 열강은 앞다투어 식민지 건설에 열을 올렸고, 이는 노예무역으로 확대되었고, 식민지의 거대한 플랜테이션 농업으로 발전했다. 식민지에서 노예들을 통해 사탕수수, 면화, 커피 등을 생산하여 유럽으로 가져갔고 막대한 이익을 올렸다.
작금의 AI 기반 빅 테크 기업들의 경영 방식은 오래된 미래에 불과하다. 내용과 형식이 바뀌었을 뿐 늘 존재해 오던 시스템의 연장이다. 여전히 기술을 선점한 그들은 정치를 압박하여 글로벌 시장을 개척하고 공장이전과 데이터 센터 이전 등을 통해 저임금 노동자들을 끌어들이며, 또한 자동화 시스템을 통해 대량 해고 등을 강행한다.
유발 하라리가 경고하듯이 신기술은 결국 극소수 상류층의 전유물이 될 것이며 대부분의 인류는 사용과 혜택의 수혜자가 아니라 그들의 이익을 위한 소비자로 전락할 것이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너도나도 빅 테크의 CEO가 되기 위한 무한 경쟁에 뛰어들 것인가? 극소수만이 가능한 신화적 인물이 되기 위해 아귀 다툼을 할 것인가? 아니면 깨어 있는 시민의 연대와 행동으로 기술 사회의 이익을 공유할 것인가? 당연히 후자여야 한다.
우선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미국의 저명한 학자 찰스 아이젠스타인은 『신성한 경제학의 시대』에서 ‘태초에 선물이 있었다’라는 선언을 한다. 즉 우리가 사용하는 모든 재화는 신의 선물임을 자각하자는 말이다. 우리는 공공재를 사용한다. 선물로 받은 것을 이윤 추구로 전락해서는 안 된다. 마이클 샌델 교수는 재능 역시 선물이라고 강조한다. 지적 능력이나 예술적 능력 등도 부모에게서 선물로 받은 것이니 사회를 위해 헌신하자고 강조한다.
실제로 기업이나 개인은 정부의 막대한 지원을 받는다. 정부의 정책 기조에 따라 특정 기업이나 개인 등이 현금 지원이나 세금 혜택을 받는다. 정부의 직간접 지원이 이루어졌다면 당연히 이익의 사회화로 연결되어야 마땅하다. 정부의 재화로 깔아 놓은 공적 판에 그들이 무임승차하고 있지 않은가? 정부의 지원, 세금의 지원이 들어갔다면 당연히 이익의 사회화, 사용의 사회화가 이루어져야 한다. 이를 당당히 요구해야 한다.
저자들은 데이터 노동자들의 연대 행동, 초국적 연합, 초국적 노동조합이라는 실제적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미국의 60년대 민권운동처럼, 권력은 요구하지 않으면 양보하지 않는다. 연대를 통한 당당한 요구와 목소리가 필요하다. 노동조합과 더불어 필요한 것은 공동결정권이다. 즉 노동자가 사용자와 함께 이사회의 일원으로 참여하여 권리를 요구하는 것이다.

사진: Unsplash의 Fauzan
프랑스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는 오래전부터 기업이 정부의 지원 아래 엄청난 혜택을 누려왔음을 통계로 제시했다. 정부의 지원을 받았기에 이익의 사회화도 이루어져야 마땅하다. 하버드의 정치학자 마이클 샌델 교수 역시 기업들이 무에서 유를 창조한 것이 아니라 정부의 주도하에 엄청난 지원을 받았으며 지금도 혜택을 받고 있음을 지적하며 기업들의 공적 역할을 강조한다.
영국의 가이 스탠딩 교수가 이끄는 기본소득 네트워크도 대안이다. AI 기술이 일자리를 축소하는 것이라면 그 이익의 사회적 공유를 이야기해야 한다. 기본소득, 기본자산, 누진세의 확대와 보편복지의 확대를 공론화해야 할 것이다. 리트허르 브레히만은 공유지의 확대, 재사용 문제를 거론한다. 영국에서 시작된 엔클로저 (토지의 사유화) 운동은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라 공공재를 가로챈 것이라는 인식의 전환이다.
지그 지글러의 말처럼 시도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 박찬욱의 영화에서 유만수는 어쩔 수가 없다며 파멸을 향한 경쟁에 뛰어들었지만, 우리는 어쩔 수를 찾아보자. 어쩔 수 있는 대안을 시도하자. 인식의 전환, 정치적 공론에의 적극 참여, 인류 공존을 위한 연대 등 어쩔 도리를 찾고 시도하자. 어쩌면 이 책을 읽고 토론하는 지금이 어쩔 수를 찾는 것인지도..
이달 책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 『AI는 인간을 먹고 자란다』 / 마크 그레이엄 외 2명 지음 / 흐름출판 -
글 | 김양현
과신뷰 편집장
기독인문연구소 시시당 대표
박찬욱 감독의 영화 [어쩔수가없다]의 엔딩 장면은 섬뜩했다. 제지회사의 합병으로 인해 실직한 주인공 유만수는 새 회사에 입사하기 위해 잠재적 경쟁자들을 한 명씩 제거해 나간다. 자신이 살기 위해서 어쩔 수가 없었다. 우여곡절 끝에 그는 새 제지회사에 취직한다. 하지만 그에게 맡겨진 임무는 거대한 자동화 공장의 전원을 켜고 끄는 일이다. 인간끼리의 치열한 승부를 펼친 그가 기계에 밀려나는 꼴이라니.
AI의 시대가 우리 앞에 펼쳐지고 있다. 80년대 이후 닷컴 열풍이 불었고, 플랫폼 기업이 부상했다. 빌 게이츠, 제프 베이조스, 마크 주커버그, 스티브 잡스 등 신화적 인물들의 시대였다. 혁신의 아이콘, 천문학적인 연봉, 시대를 이끄는 우상의 등장이었다. 이제 그들의 시대가 저물고 샘 알트만으로 대표되는 AI 기업의 시대가 열린다.
AI (Artificial Intelligence)는 마치 신처럼 우리에게 전지전능하게 보인다. 모르는 것이 없고 대답하지 못하는 것이 없는 존재와 같다. 하지만 실제 인공지능은 기존의 데이터를 처리하여 결정, 예측, 추천하는 기계 기반 시스템이다. 최근 AI는 거대언어모델(Large Language Model)을 중심으로 빠르게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또한 AGI(Artificial General Intelligence), 피지컬 AI 등의 상용화로 인간 지능과 흡사한 시스템으로 발전하고 있다.
사진: Unsplash의 Growtika
이런 시대에 우리는 두 가지 염려를 한다. 하나는, SF 영화 터미네이터와 같이 기계 인간이 인류를 대체하거나 멸망시킬 것에 대한 두려움이고, 또 하나는 기계가 인간의 일자리를 대체하게 되면 인간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두려움이다. 전자가 오지 않은 미래적 두려움이라면 후자는 이미 진행형인 현재적 두려움이다.
실제로 AI의 도입으로 번역, 통역, 행정 보조 같은 업무 종사자들의 일자리가 점점 축소되고 있고, 변호사, 교수, 대학 집단 등의 직업군이 위기라는 진단을 하고 있다. 게다가 로봇이 물류센터와 공장에 투입됨으로 인간의 일자리가 점차 사라지고 있다. 자율주행 시스템의 발달은 장거리 운전사들을 대체하고 있다.
이 책 [AI는 인간을 먹고 자란다]의 공동저자들은 현재 진행형인 사례들을 추적하고 있다. 아프리카 데이터 센터의 직원들은 저임금 노동에 시달리고 있다. 실제로 AI는 데이터 싸움이기에 사람이 데이터를 지속적으로 주입해 주어야 한다. 그 작업을 수많은 데이터 센터 직원들이 감당하고 있다. 이들은 언제든지 대체될 수 있는 인력들이어서 열악한 노동 환경에 대한 저항을 하지 못한다.
아이슬란드의 데이터 센터는 AI의 전 지구적 연결망을 보여준다. 아이슬란드는 연간 온도가 0도에서 10도 사이를 유지하므로 데이터 센터가 들어서기에 좋은 입지 조건을 가지고 있다. 실제 런던이나 파리 등에 본사를 둔 기업들은 아이슬란드에 데이터 센터를 둠으로 인력 및 비용 절감 등 유리한 경영을 하게 된다. 전 지구적으로 설치된 광섬유 기반 케이블은 데이터의 신속하고 정확한 흐름을 유지할 수 있게 한다.
물론 이런 광케이블은 빅 테크 기업들의 독점 소유물이다. 이들은 케이블을 독점하고 정보를 점유함으로 막대한 이익을 취한다. 아마존 같은 기업들은 물류센터를 자동화함으로 비용을 절감할 뿐 아니라 단기 계약자들을 고용함으로 그들에게 최소한의 임금을 지불한다. 이런 비용 절감으로 기업의 CEO나 임원들은 천문학적인 수익을 나눠 가진다.
플랫폼 기업의 CEO 뿐 아니라 빅 테크를 이끄는 리더들은 겉으로는 진보적 사상을 말하고 인류의 공영을 이야기하지만, 실제 그들이 기업을 운영하는 방식은 독재에 가깝다. 그리고 대부분 이들은 백인 남성들이기에 백인 남성들의 정치적 사상을 드러내고 실제 인공지능 시스템도 그러한 정치적, 경제적 편향을 사용자에게 주입하고 있다.
사진: Unsplash의 Nguyễn Duy Hưng
그런데 이런 경향은 어디선가 본 듯하다. 기시감이 든다. 그렇다. 실제로 15세기 대항해 시대를 열었던 스페인, 포르투갈, 영국, 네덜란드 등의 열강이 사용했던 방식이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신대륙 진출 이후로 열강은 앞다투어 식민지 건설에 열을 올렸고, 이는 노예무역으로 확대되었고, 식민지의 거대한 플랜테이션 농업으로 발전했다. 식민지에서 노예들을 통해 사탕수수, 면화, 커피 등을 생산하여 유럽으로 가져갔고 막대한 이익을 올렸다.
작금의 AI 기반 빅 테크 기업들의 경영 방식은 오래된 미래에 불과하다. 내용과 형식이 바뀌었을 뿐 늘 존재해 오던 시스템의 연장이다. 여전히 기술을 선점한 그들은 정치를 압박하여 글로벌 시장을 개척하고 공장이전과 데이터 센터 이전 등을 통해 저임금 노동자들을 끌어들이며, 또한 자동화 시스템을 통해 대량 해고 등을 강행한다.
유발 하라리가 경고하듯이 신기술은 결국 극소수 상류층의 전유물이 될 것이며 대부분의 인류는 사용과 혜택의 수혜자가 아니라 그들의 이익을 위한 소비자로 전락할 것이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너도나도 빅 테크의 CEO가 되기 위한 무한 경쟁에 뛰어들 것인가? 극소수만이 가능한 신화적 인물이 되기 위해 아귀 다툼을 할 것인가? 아니면 깨어 있는 시민의 연대와 행동으로 기술 사회의 이익을 공유할 것인가? 당연히 후자여야 한다.
우선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미국의 저명한 학자 찰스 아이젠스타인은 『신성한 경제학의 시대』에서 ‘태초에 선물이 있었다’라는 선언을 한다. 즉 우리가 사용하는 모든 재화는 신의 선물임을 자각하자는 말이다. 우리는 공공재를 사용한다. 선물로 받은 것을 이윤 추구로 전락해서는 안 된다. 마이클 샌델 교수는 재능 역시 선물이라고 강조한다. 지적 능력이나 예술적 능력 등도 부모에게서 선물로 받은 것이니 사회를 위해 헌신하자고 강조한다.
실제로 기업이나 개인은 정부의 막대한 지원을 받는다. 정부의 정책 기조에 따라 특정 기업이나 개인 등이 현금 지원이나 세금 혜택을 받는다. 정부의 직간접 지원이 이루어졌다면 당연히 이익의 사회화로 연결되어야 마땅하다. 정부의 재화로 깔아 놓은 공적 판에 그들이 무임승차하고 있지 않은가? 정부의 지원, 세금의 지원이 들어갔다면 당연히 이익의 사회화, 사용의 사회화가 이루어져야 한다. 이를 당당히 요구해야 한다.
저자들은 데이터 노동자들의 연대 행동, 초국적 연합, 초국적 노동조합이라는 실제적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미국의 60년대 민권운동처럼, 권력은 요구하지 않으면 양보하지 않는다. 연대를 통한 당당한 요구와 목소리가 필요하다. 노동조합과 더불어 필요한 것은 공동결정권이다. 즉 노동자가 사용자와 함께 이사회의 일원으로 참여하여 권리를 요구하는 것이다.
사진: Unsplash의 Fauzan
프랑스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는 오래전부터 기업이 정부의 지원 아래 엄청난 혜택을 누려왔음을 통계로 제시했다. 정부의 지원을 받았기에 이익의 사회화도 이루어져야 마땅하다. 하버드의 정치학자 마이클 샌델 교수 역시 기업들이 무에서 유를 창조한 것이 아니라 정부의 주도하에 엄청난 지원을 받았으며 지금도 혜택을 받고 있음을 지적하며 기업들의 공적 역할을 강조한다.
영국의 가이 스탠딩 교수가 이끄는 기본소득 네트워크도 대안이다. AI 기술이 일자리를 축소하는 것이라면 그 이익의 사회적 공유를 이야기해야 한다. 기본소득, 기본자산, 누진세의 확대와 보편복지의 확대를 공론화해야 할 것이다. 리트허르 브레히만은 공유지의 확대, 재사용 문제를 거론한다. 영국에서 시작된 엔클로저 (토지의 사유화) 운동은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라 공공재를 가로챈 것이라는 인식의 전환이다.
지그 지글러의 말처럼 시도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 박찬욱의 영화에서 유만수는 어쩔 수가 없다며 파멸을 향한 경쟁에 뛰어들었지만, 우리는 어쩔 수를 찾아보자. 어쩔 수 있는 대안을 시도하자. 인식의 전환, 정치적 공론에의 적극 참여, 인류 공존을 위한 연대 등 어쩔 도리를 찾고 시도하자. 어쩌면 이 책을 읽고 토론하는 지금이 어쩔 수를 찾는 것인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