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 영화] 오디세이 (김양현)

과학과 신학의 대화
2026-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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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 영화

오디세이


글 | 김양현
과신뷰 편집장
기독인문연구소 시시당 대표


⚠️ 영화 내용 등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b46890c78d262.jpg 오디세이

 ▶ 감독: 크리스토퍼 놀란

 ▶ 주연: 맷 데이먼(오디세우스), 톰 홀랜드(텔레마코스),

                앤 해서웨이(페넬로페)


  고대 그리스 시인 헤시오도스는 시대를 5개로 구분했다. 제우스의 아버지 크로노스가 통치하던 황금의 시대, 제우스의 통치 시기인 은의 시대, 인간들이 서로 싸우던 청동의 시대, 그리고 신들이 인간을 구하기 위해 영웅들을 보낸 영웅의 시대, 그리고 자신이 살던 철의 시대였다. 헤시오도스는 역사는 점점 퇴보하고 있고, 인간은 전쟁과 노동에 시달리고 있다고 판단했다. 헤시오도스는 트로이 전쟁을 영웅의 시대로 규정했다. 인간들 사이에 일어난 전쟁, 그리고 그 전쟁을 끝내고 인간을 구하는 반신반인의 영웅들을 그렸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이 그린 오디세이는 헤시오도스의 역사관과 맞닿아 있다. 영화의 시작과 중간, 그리고 끝에 지속적으로 등장하는 ‘제우스의 법’ 즉 ‘크세니아’(환대)가 영화의 중심 내용을 관통한다. 남에게 대접을 받고 싶은 대로 남을 대접하는 것, 이방인과 나그네는 신이 변장을 하고 온 존재이므로 극진히 대접해야 한다는 규정이다. 크세니아 법은 인류 역사에서 황금률로 불린다. 창세기 18장에 천사들을 대접한 아브라함의 환대도 이런 법에 속한다. 이런 법이 왜 존재했을까? 서로를 존중하고 공존하기 위한 암묵적 합의다. 


  고대 사람들은 이런 시대를 황금의 시대 또는 은의 시대라 불렀다. 상대를 존중하며 무역과 교류를 통해 공존하던 시대였다. 


  트로이 전쟁은 이 법칙을 깨버렸다. 미케네의 왕 아가멤논은 동생 메넬라오스의 아내인 헬레나를 납치한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를 치겠다는 이유로 전쟁을 벌였고, 미케네에 종속된 작은 봉신국들의 왕들도 이 전쟁에 참전했다. 약 10년동안 전쟁이 벌어졌으나 승패가 갈리지 않았다. 이런 중에 그 유명한 아킬레우스가 트로이의 왕자 헥토르를 죽이면서 전세는 기울어졌고, 이타카의 왕이자 지략가인 오디세우스의 목마 작전으로 트로이 성은 함락된다. 학살과 파괴가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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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스틸컷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오디세우스의 자책과 반성을 주요 주제로 영화를 전개해 나간다. 트로이 목마 작전은 ‘크세니아’를 깬 것이며, 이로 인한 신들의 저주를 오디세우스가 감당해 나가야 했다. 놀란 감독은 지속적으로 자신의 과거, 즉 트로이의 학살을 반성하는 오디세우스를 그려나간다. 


  또한 외눈박이 괴물 폴리페모스 역시 크세니아 법을 어기는 존재로 그려진다. 식량을 구하기 위해 다가온 사람들을 폴리페모스는 자신의 식량으로 먹어치운다. 이에 저항하기 위해 오디세우스 일행도 폴리페모스의 눈을 찌른 채 도망가 버린다. 키르케의 집 상황도 마찬가지다. 식량을 구하기 위해 온 병사들을 키르케는 의심한다. 그리고 자신의 속임수와 마법으로 그들을 돼지로 만들어 버린다. 키르케가 그렇게 한 이유는 이미 상당수의 병사들이 그의 집을 침략하고 약탈한 것에 기인한다. 키르케는 군사들을 믿지 못하고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마법을 사용한다. 


  칼립소의 상황도 마찬가지다. 칼립소는 난파된 오디세우스를 자신의 집에 머무르게 하려고 로토스 잎을 먹인다. 그의 기억을 사라지게 한다. 칼립소의 방식 역시 온전한 크세니아는 아니다. 그녀는 자신의 방식대로, 자신의 욕망을 손님에게 투영한다. 그것은 진정한 손님 대접이 아니라 억압하는 것에 불과하다. 결국 칼립소는 오디세우스를 놓아준다. 


  이타카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 또한 마찬가지다. 놀란 감독은 안티노오스를 비롯한 불청객들을 ‘크세니아’를 악용하는 존재로 그린다. 그들은 손님 대접을 강요하는 자들이다. 자신들은 대접하지 않으면서 페넬로페와 텔레마코스에게 크세니아를 강요한다. 안티노오스를 비롯한 구혼자들은 무뢰한들이다. 


  놀란 감독이 그린 오디세우스의 귀향 과정은 단순한 고향으로 가는 여정이 아니다. 자신이 깬 크세니아에 대한 회한과 반성, 그리고 다시 세상을 바로 잡아야 겠다는 열정이다. 오디세우스의 귀향은 곧 본향으로의 회귀다. 고대 적의 이상적 사회로 돌아감이다. 그래서 감독은 영화 말미에 페넬로페와 함께 서쪽으로 향하는 오디세우스를 넣었다. 이상향으로의 이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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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스틸컷


  150여년 전 뉴욕의 뒷골목에서 헨리 조지는 세상의 아이러니를 발견했다. 뉴욕에 솟아 오른 마천루와 기차, 문명의 흔적들 뒤편에 식량을 구걸하며 노숙하는 자들을 발견했다. 그는 세상이 이렇게 진보하는데 왜 빈곤이 가득한 지에 대한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원인을 분석했다. 그가 내린 결론은 자본가들과 지주들의 지나친 탐욕이었다. 탐욕의 세상에는 환대가 자리할 수 없다. 헨리 조지는 책 말미에 자신의 사명과 소망을 간절히 기록한다. 그것은 곧 고대의 황금시대의 회복이다. 서로를 존중하며 함께 공존하는 세상, 예수께서 펼치시고 가르치신 하나님 나라의 이상이다. 산상수훈에서 강조한 팔복이 펼쳐지는 세상이다. 


  헨리 조지를 좋아했던 톨스토이 역시 그 세상을 소망했다. 톨스토이는 자신의 마지막 장편 소설 ‘부활’에서 네흘류도프 공작을 통해 그 세상을 염원한다. 톨스토이의 화자인 네흘류도프 역시 자기 땅을 소작인들에게 나눠주고 산상수훈을 깊이 묵상한다. 산상수훈에서 제시한 하나님 나라에 대한 간절한 소망, 그 나라를 이루기 위해 기도한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염원대로 황금시대는 다시 올 수 있을까? 오디세우스처럼 자신의 과거를 참회하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내는 위인들이 등장할 수 있을까? 온 세상이 전쟁 중이다. 트로이 전쟁은 지금도 진행형이다. 온갖 이유를 들어 파괴하고 침략하고 죽이는 일에 혈안이다. 전쟁의 여파로 인해 전 세계 사람들이 경제적 압박을 받고 일자리가 사라지며 고 물가에 허덕인다. 아가멤논을 따랐던 자들이 파괴한 세상이 펼쳐지고 있다. 자본주의가 판치는 세상에는 환대는 설 자리가 없다. 


  ‘크세니아’ 환대의 세상이 다시 올 수 있을까? 그 세상은 어떻게 펼쳐질까? 피터 버거는 인류가 ‘거룩한 차양’(Sacred Canopy)를 치워버렸다고 한탄했다. 이제 다시 거룩한 차양을 펼쳐야 할 때 아닐까? 기본적 규범, 황금률을 다시 강조해야 할 때가 아닐까? 내가 소중한 만큼 타인도 소중하다는 것, 너가 없으면 나도 없다는 단순한 진리,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가르침을 실천해야 하지 않을까? 그것이 진정한 귀향, 본향으로의 여정 아닐까? 예수께서 세우시고 요한이 꿈꾸었던 그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지길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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