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며
모든 인간은 단 하나의 세포인 수정란에서 시작한다고 한다. 그리고 이 단 하나의 세포인 수정란이 사람이 되는 과정을 연구하는 학문, 그것이 바로 ‘발생생물학’이다. 인간은 어떻게 단 하나의 세포에서 비롯될 수 있을까? 정자와 난자가 만나서 수정이 되고, 이 수정란이 다양한 세포를 만들어내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과학적 사실들을 그려내고 있다. 그런데 단순히 과학적 사실들을 그려내는 것이 아닌 신앙의 여정을 같이 풀어놨다.
이런 면에서 오늘의 신간 <생물학자의 신앙고백>은 발성생물학을 통해 신앙을 들여다보는 아름다운 신앙고백서이다. 저자와 함께 과학적 사실을 통해 신앙을 읽어 내려가다 보면 어느샌가 담백한 신앙을 마주하게 되는 그런 책이다. 하나님의 일반 계시인 과학적 사실을 바탕으로 하나님의 특별계시로 형성되는 신앙을 더욱 깊고 풍성하게 누릴 수 있기에 과학과 신학의 대화에 잘 어울리는 책이라 생각된다. 그럼 책을 읽으면서 인상 깊었던 부분 몇 가지를 소개하고자 한다.
수정
정자와 난자가 수정되기 전에 처음으로 물리적인 접촉이 필요하다. 물리적인 접촉에는 단순히 정자의 이동만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다양한 호르몬과 세포들의 합작으로 인해서 이루어진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정자가 난자까지 도달하는 과정은 쉽지 않다. 여러 고난과 역경이 필요하다. 그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인데, 정자는 여성의 몸에 있는 세포가 아니라 외부에서 유입된 세포이다. 여성의 질과 자궁, 그리고 나팔관까지 이르는 과정에서 마주치게 되는 위험은 늘 존재한다.
그러나 이때 만나기까지의 과정에서 정자는 과활성화(hyperactivity) 단계에 들어서게 되고 강하고 빠른 정자가 되는 일종의 성숙화 과정을 거치게 된다. 비로소 이때에 난자에게 충분히 다가갈 수 있다. 기억을 하지 못할 뿐 이미 우리 모두가 경험한 사건이지 않는가? 우리가 지금 우리의 어머니의 뱃속에서 나왔다는 것은 자궁을 지나 나팔관을 통과한 순간들을 겪었다는 것이다. 저자는 그와 마찬가지로 신앙에도 성숙을 겪고 어려움을 통과한 순간들이 있음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어찌 보면 그러한 성숙은 정자에게 생존의 문제인 것처럼 우리의 신앙도 그와 같이 않나 생각해 본다. 사도 바울이 말한 것처럼 믿음의 경주를 달려나가는 것처럼 우리의 신앙도 계속해서 성숙을 향해 달려나가는 과정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 책을 읽다 보면 이러한 과학적 사실에 대한 신앙적 비유를 통해 삶과 연관된 신앙을 좀 더 밀접하게 생각할 수 있게 한다.
발생
수정이 완료된 수정란은 이제 낭배 형성의 단계로 들어간다. 이 배엽의 분화가 굉장히 중요한데 이를 두고 저명한 발생학자 루이스 월퍼트(Lewis Wolpert)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당신의 인생에서 진정 최고로 중요한 시기는 출생도 결혼도 죽음도 아닌 낭배형성이다.” 바로 이 시기에 낭배형성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면 인체의 각 신체기관이 제대로 형성되지 않는다. 극단적인 예로서 하나는 분화가 되지 않다 샴쌍둥이가 생기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신체 장기가 분화되는 이 시기가 굉장히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 과정을 좀 더 살펴보면 외배엽, 중배엽, 내배엽으로 분화가 되기 전에 일종의 원시선이 생겨나게 된다. 이러한 원시선이 비정상적으로 유지되면 신체에 돌이킬 수 없는 장애가 생기게 된다. 하지만 보통의 경우 원시선은 금세 사라지고 낭배형성이 되며 내배엽, 중배엽, 외배엽으로 나뉜다. 이후 내배엽은 소화계, 내분비계, 호흡계 기관으로 분화되고 중배엽은 근골격계, 순환계, 생식계, 배출계 기관으로 외배엽은 신경계 기간과 상피조적으로 분화된다. 재미있는 점은 이 세 가지 배엽은 이내에 곧 사라진다. 저자의 말대로 정확히 말하자면 다른 모습으로 탈바꿈을 한다. 그리고 이러한 모습이 신앙의 모습과 맞닿아있다고 말한다.
우리가 처음 복음을 접할 때 받아들이는 신앙의 전통은 굉장히 익숙하고 당연한 문화이다. 때론 자부심을 갖는 것도 괜찮다. 하지만 낭배 분할이 될 때 그 ‘원시선’들이 사라지지 않고 계속해서 남게 된다면 배아에 치명적 상황, 결국 배아가 죽음에 이르게 되는 것처럼 자신이 가지고 있는 교단 신학이나 신앙 전통만이 유일한 것으로 생각하는 신앙의 모습이 사라지지 않는다면 어떤 발달도 불가능한 상태가 돼버린다는 것이다.
정확한 비유는 아니지만 율법이 은혜를 깨닫는 수단은 될 수 있어도 율법이 은혜에 자리를 내주지 않는다면 바리새인으로 남는 것과 비슷한 예일까? 사도 바울이 경고한 것처럼 율법은 은혜를 위한 ‘원시선’에 불과한 데 말이다. 우리에게 성숙이란 사람으로서 자라나기 위한 필수불가결한 요소임을 다시금 느끼게 되었다.
하나의 수정란으로 시작한 우리도 각 단계를 밝아가며 발생했다.
노화
책을 읽으면서 가장 확신이 없는(?) 부분이라면 노화 부분이 아닐까 싶다. 저자도 글을 쓰는 필자도 살아본 적이 없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저자도 노화의 현상을 객관적으로 이해하는 선에서 글을 적어내려간다. 노화는 세포가 분열하는 기능이 현저하게 떨어지거나 잃어버리는 것을 이야기한다. 좀 더 물리학적인 표현으로 말하자면 우리의 몸이 점차 무질서한 경향을 띠게 되는 것이다. 생명이 무질서에 저항해 질서를 만들어내었다면 노화과정은 이제 질서를 만들어내던 몸이 점차 무질서를 향해 다시 가는 과정이 아닐까. 아무튼 노화의 시기에 이르면 신체의 모든 기관은 효율이 나빠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여러 질병들도 생겨나게 된다.
우리의 신앙의 노화란 무엇일까? 남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완고한 태도를 갖는 꼰대로 남아있게 될까? 아니면 다른 사람들에게 귀감이 되는 신앙의 선배로 남게 될까? 인생의 선배들은 인생의 황혼에서 잘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잘 죽는 것도 중요하다는 말씀을 한다고 한다. 젊은 시절의 자기중심성과 혈기를 넘어서서 다른 사람을 품고 사랑하는 마음과 내어줌이 있지 않을까? 필자는 여기에서 이어령 선생님의 친필을 소개하며 죽음, 고통, 원망보다는 성실한 사랑이 되는 노년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했다. 이러한 삶의 마지막 모습에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케노시스’가 떠올랐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케노시스 창조이론’에서 읽었던 죽음과 고통의 문제를 생각해 보았다.
죽음과 고통의 문제, 철학적인 문제가 아니라 진화의 과정 중에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죽음과 고통을 다른 생명체를 위한 내어줌으로 설명하던 그 글이 생각났다. 육식 동물이 초식 동물을 잡아먹는 그러한 고통과 죽음을 보면서 오히려 그것을 십자가의 희생 비유로 풀어내던 그 글이 생각났다. 한 생명체의 고통과 죽음이 다른 생명체의 생명에 필수적인 조건이 되는 그것을 ‘내어줌’과 ‘사랑’으로 설명할 수 있다면 우리의 신앙의 마지막도 노년의 마지막으로 그래야 하지 않을까. 육신의 부모가 우리에게 내어주므로 우리의 육신이 시작되었고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자신의 몸을 내어주므로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어주므로 시작해서 내어주기 위해 성숙하고 마지막으로 내어줌으로 영원한 생명에 들어가는 그런 삶이 아닐까 책을 읽으며 생각해 봤다.
마무리
사실 이 책을 읽으면서 어떤 ‘눈’을 가지고 있는지가 중요하다는 것을 느꼈다. 같은 현상을 보더라도 생물학자이건 물리학자이건 철학자 건 역사학자 건 ‘신앙’이 있는 자는 그 어디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마주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특별계시인 성경에서만 그리스도를 느끼고 체험하는 것은 신앙의 초보적인 단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과 같다. 하지만 신앙이 성장하고 무르익어 갈수록 성경을 벗어나 결국 이 모든 세계가 창조주 하나님이 지으셨을 뿐만 아니라 다스리고 계시는 세상임을 날마다의 삶 속에서 깨닫게 된다.
그리고 하루하루 삶 속에서 마주치는 그 은혜를, 신앙고백을 이 책에서는 제5부 신앙의 여정에서 잘 그려냈으니 읽어보시기를 바란다. 우리가 모두가 같은 생각을 갖고 있을지라도 삶 속에서 마주치는 에피소드는 각자 고유의 것 아니겠는가? 아름다운 신앙고백서인 이 책을 읽을 수 있어서 영광이었다. 저자뿐만 아니라 이 글을 읽는 독자들도 ‘꽃 파는 화원’의 신앙고백, ‘샐러리맨’의 신앙고백 등 자신만의 신앙고백을 만들어나가기를 소원한다.
한 줄 평 : "그리스도인의 눈에는 은혜만 보인다"
글 | 박아론
현재 과신대에서 행정팀장으로 사무국을 지키고 있다
들어가며
모든 인간은 단 하나의 세포인 수정란에서 시작한다고 한다. 그리고 이 단 하나의 세포인 수정란이 사람이 되는 과정을 연구하는 학문, 그것이 바로 ‘발생생물학’이다. 인간은 어떻게 단 하나의 세포에서 비롯될 수 있을까? 정자와 난자가 만나서 수정이 되고, 이 수정란이 다양한 세포를 만들어내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과학적 사실들을 그려내고 있다. 그런데 단순히 과학적 사실들을 그려내는 것이 아닌 신앙의 여정을 같이 풀어놨다.
이런 면에서 오늘의 신간 <생물학자의 신앙고백>은 발성생물학을 통해 신앙을 들여다보는 아름다운 신앙고백서이다. 저자와 함께 과학적 사실을 통해 신앙을 읽어 내려가다 보면 어느샌가 담백한 신앙을 마주하게 되는 그런 책이다. 하나님의 일반 계시인 과학적 사실을 바탕으로 하나님의 특별계시로 형성되는 신앙을 더욱 깊고 풍성하게 누릴 수 있기에 과학과 신학의 대화에 잘 어울리는 책이라 생각된다. 그럼 책을 읽으면서 인상 깊었던 부분 몇 가지를 소개하고자 한다.
수정
정자와 난자가 수정되기 전에 처음으로 물리적인 접촉이 필요하다. 물리적인 접촉에는 단순히 정자의 이동만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다양한 호르몬과 세포들의 합작으로 인해서 이루어진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정자가 난자까지 도달하는 과정은 쉽지 않다. 여러 고난과 역경이 필요하다. 그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인데, 정자는 여성의 몸에 있는 세포가 아니라 외부에서 유입된 세포이다. 여성의 질과 자궁, 그리고 나팔관까지 이르는 과정에서 마주치게 되는 위험은 늘 존재한다.
그러나 이때 만나기까지의 과정에서 정자는 과활성화(hyperactivity) 단계에 들어서게 되고 강하고 빠른 정자가 되는 일종의 성숙화 과정을 거치게 된다. 비로소 이때에 난자에게 충분히 다가갈 수 있다. 기억을 하지 못할 뿐 이미 우리 모두가 경험한 사건이지 않는가? 우리가 지금 우리의 어머니의 뱃속에서 나왔다는 것은 자궁을 지나 나팔관을 통과한 순간들을 겪었다는 것이다. 저자는 그와 마찬가지로 신앙에도 성숙을 겪고 어려움을 통과한 순간들이 있음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어찌 보면 그러한 성숙은 정자에게 생존의 문제인 것처럼 우리의 신앙도 그와 같이 않나 생각해 본다. 사도 바울이 말한 것처럼 믿음의 경주를 달려나가는 것처럼 우리의 신앙도 계속해서 성숙을 향해 달려나가는 과정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 책을 읽다 보면 이러한 과학적 사실에 대한 신앙적 비유를 통해 삶과 연관된 신앙을 좀 더 밀접하게 생각할 수 있게 한다.
발생
수정이 완료된 수정란은 이제 낭배 형성의 단계로 들어간다. 이 배엽의 분화가 굉장히 중요한데 이를 두고 저명한 발생학자 루이스 월퍼트(Lewis Wolpert)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당신의 인생에서 진정 최고로 중요한 시기는 출생도 결혼도 죽음도 아닌 낭배형성이다.” 바로 이 시기에 낭배형성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면 인체의 각 신체기관이 제대로 형성되지 않는다. 극단적인 예로서 하나는 분화가 되지 않다 샴쌍둥이가 생기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신체 장기가 분화되는 이 시기가 굉장히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 과정을 좀 더 살펴보면 외배엽, 중배엽, 내배엽으로 분화가 되기 전에 일종의 원시선이 생겨나게 된다. 이러한 원시선이 비정상적으로 유지되면 신체에 돌이킬 수 없는 장애가 생기게 된다. 하지만 보통의 경우 원시선은 금세 사라지고 낭배형성이 되며 내배엽, 중배엽, 외배엽으로 나뉜다. 이후 내배엽은 소화계, 내분비계, 호흡계 기관으로 분화되고 중배엽은 근골격계, 순환계, 생식계, 배출계 기관으로 외배엽은 신경계 기간과 상피조적으로 분화된다. 재미있는 점은 이 세 가지 배엽은 이내에 곧 사라진다. 저자의 말대로 정확히 말하자면 다른 모습으로 탈바꿈을 한다. 그리고 이러한 모습이 신앙의 모습과 맞닿아있다고 말한다.
우리가 처음 복음을 접할 때 받아들이는 신앙의 전통은 굉장히 익숙하고 당연한 문화이다. 때론 자부심을 갖는 것도 괜찮다. 하지만 낭배 분할이 될 때 그 ‘원시선’들이 사라지지 않고 계속해서 남게 된다면 배아에 치명적 상황, 결국 배아가 죽음에 이르게 되는 것처럼 자신이 가지고 있는 교단 신학이나 신앙 전통만이 유일한 것으로 생각하는 신앙의 모습이 사라지지 않는다면 어떤 발달도 불가능한 상태가 돼버린다는 것이다.
정확한 비유는 아니지만 율법이 은혜를 깨닫는 수단은 될 수 있어도 율법이 은혜에 자리를 내주지 않는다면 바리새인으로 남는 것과 비슷한 예일까? 사도 바울이 경고한 것처럼 율법은 은혜를 위한 ‘원시선’에 불과한 데 말이다. 우리에게 성숙이란 사람으로서 자라나기 위한 필수불가결한 요소임을 다시금 느끼게 되었다.
하나의 수정란으로 시작한 우리도 각 단계를 밝아가며 발생했다.
노화
책을 읽으면서 가장 확신이 없는(?) 부분이라면 노화 부분이 아닐까 싶다. 저자도 글을 쓰는 필자도 살아본 적이 없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저자도 노화의 현상을 객관적으로 이해하는 선에서 글을 적어내려간다. 노화는 세포가 분열하는 기능이 현저하게 떨어지거나 잃어버리는 것을 이야기한다. 좀 더 물리학적인 표현으로 말하자면 우리의 몸이 점차 무질서한 경향을 띠게 되는 것이다. 생명이 무질서에 저항해 질서를 만들어내었다면 노화과정은 이제 질서를 만들어내던 몸이 점차 무질서를 향해 다시 가는 과정이 아닐까. 아무튼 노화의 시기에 이르면 신체의 모든 기관은 효율이 나빠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여러 질병들도 생겨나게 된다.
우리의 신앙의 노화란 무엇일까? 남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완고한 태도를 갖는 꼰대로 남아있게 될까? 아니면 다른 사람들에게 귀감이 되는 신앙의 선배로 남게 될까? 인생의 선배들은 인생의 황혼에서 잘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잘 죽는 것도 중요하다는 말씀을 한다고 한다. 젊은 시절의 자기중심성과 혈기를 넘어서서 다른 사람을 품고 사랑하는 마음과 내어줌이 있지 않을까? 필자는 여기에서 이어령 선생님의 친필을 소개하며 죽음, 고통, 원망보다는 성실한 사랑이 되는 노년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했다. 이러한 삶의 마지막 모습에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케노시스’가 떠올랐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케노시스 창조이론’에서 읽었던 죽음과 고통의 문제를 생각해 보았다.
죽음과 고통의 문제, 철학적인 문제가 아니라 진화의 과정 중에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죽음과 고통을 다른 생명체를 위한 내어줌으로 설명하던 그 글이 생각났다. 육식 동물이 초식 동물을 잡아먹는 그러한 고통과 죽음을 보면서 오히려 그것을 십자가의 희생 비유로 풀어내던 그 글이 생각났다. 한 생명체의 고통과 죽음이 다른 생명체의 생명에 필수적인 조건이 되는 그것을 ‘내어줌’과 ‘사랑’으로 설명할 수 있다면 우리의 신앙의 마지막도 노년의 마지막으로 그래야 하지 않을까. 육신의 부모가 우리에게 내어주므로 우리의 육신이 시작되었고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자신의 몸을 내어주므로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어주므로 시작해서 내어주기 위해 성숙하고 마지막으로 내어줌으로 영원한 생명에 들어가는 그런 삶이 아닐까 책을 읽으며 생각해 봤다.
마무리
사실 이 책을 읽으면서 어떤 ‘눈’을 가지고 있는지가 중요하다는 것을 느꼈다. 같은 현상을 보더라도 생물학자이건 물리학자이건 철학자 건 역사학자 건 ‘신앙’이 있는 자는 그 어디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마주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특별계시인 성경에서만 그리스도를 느끼고 체험하는 것은 신앙의 초보적인 단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과 같다. 하지만 신앙이 성장하고 무르익어 갈수록 성경을 벗어나 결국 이 모든 세계가 창조주 하나님이 지으셨을 뿐만 아니라 다스리고 계시는 세상임을 날마다의 삶 속에서 깨닫게 된다.
그리고 하루하루 삶 속에서 마주치는 그 은혜를, 신앙고백을 이 책에서는 제5부 신앙의 여정에서 잘 그려냈으니 읽어보시기를 바란다. 우리가 모두가 같은 생각을 갖고 있을지라도 삶 속에서 마주치는 에피소드는 각자 고유의 것 아니겠는가? 아름다운 신앙고백서인 이 책을 읽을 수 있어서 영광이었다. 저자뿐만 아니라 이 글을 읽는 독자들도 ‘꽃 파는 화원’의 신앙고백, ‘샐러리맨’의 신앙고백 등 자신만의 신앙고백을 만들어나가기를 소원한다.
한 줄 평 : "그리스도인의 눈에는 은혜만 보인다"
글 | 박아론
현재 과신대에서 행정팀장으로 사무국을 지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