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은 존재하는가?

과학과 신학의 대화
2020-0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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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영국의 대표적인 기독교 철학자 리처드 스윈번(Richard Swinburne, 1934~)의 책이 국내에 처음으로 소개됐다. 스윈번은 그동안 분석철학과 과학철학을 활용해 기독교 신앙을 변증해 왔다. 그는 자신의 연구 성과를 정리하고, 그 내용을 대중에게 쉽게 전달하기 위한 목적으로 1996년에 <Is There a God>이라는 얇은 책을 저술했다. 이 책이 이번에 복있는사람 출판사에서 <신은 존재하는가 - 세계와 우리 존재의 기원과 과정과 목적을 논증하다>라는 제목으로 출간된 것이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기독교 철학자 책을 우리말로 읽을 수 있어 무척이나 즐거웠지만, 개인적으로는 특별한 사연이 담긴 책이라 더욱 감회가 새로웠다. 2007년 신학대학원을 졸업하면서 <리처드 스윈번의 기독교 철학>이라는 제목으로 졸업 논문을 썼는데, 이 책을 열심히 읽었던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당시 몇몇 종교철학 개론서에서 리처드 스윈번이라는 이름을 접하기는 했지만, 그의 전체적인 사상을 접할 수 없어 어렵게 공부했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추억 속에 묻혀 있던 이름이 한참의 시간이 지나 다시 등장하니, 책장 깊숙한 곳에 꽂아 둔 졸업 논문도 오랜만에 찾아서 읽어 보고, 혼자서 히쭉거리며 이불킥도 날렸다.

리처드 스윈번은 이제 85세가 넘은 노학자지만 지금까지도 연구와 집필을 멈추지 않고 꾸준하게 학문적 업적을 쌓고 있는 열정의 철학자다. 1972년부터 교편을 잡았고, 1985년부터 2002년까지 옥스퍼드대학교에서 기독교 철학 교수로 재직했다. 아마존에서 그의 이름을 검색하니 16권의 책이 나온다. 대부분 기독교 신앙을 당대 철학으로 엄밀하게 논증하고 증명한 학술서라 쉽게 접근하기 어려운 책들이다. 그런 점에서 이번에 나온 <신은 존재하는가>는 스윈번의 기독교 철학을 처음 접하는 이들에게 좋은 입문서이자 해설서가 될 것이다.



 

처음 스윈번에게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케이스 M. 파슨스(Keith M. Parsons, 1952~)이 쓴 <God and the Burden of Proof>라는 책을 통해서다. 이 책은 20세기를 대표하는 기독교 철학자 두 명을 소개하고 이들의 변증 방법론을 비교한다. 국내에도 많이 알려진 노터데임대학교의 앨빈 플랜팅가(Alvin Plantinga, 1932~)는 '개혁파 인식론'(Reformed Epistemology)이라는 방법론을 통해 기존의 토대주의 인식론과 증거주의를 논파한다. 근대 인식론의 허점과 논리적 결함을 반박하면서 종교적 믿음도 나름의 방식으로 합리성을 가지고 있다고 논증한다.

반면 리처드 스윈번은 자연신학의 방식, 즉 특별계시에 의존하지 않고 이성을 통해 신앙의 합리성을 증명하려고 한다. 이러한 자연신학은 계몽주의를 거쳐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많은 신학자와 기독교 철학자들이 지지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종교적 믿음도 충분히 합리적이고 정합적일 수 있다는 점을 보여 주는 것이다. 어떤 방식이 기독교 신앙을 변호하는 데 더 좋은 전략인지는 각자의 판단에 맡길 수 있다. 다만 스윈번의 길은 토마스 아퀴나스 이래로 오랜 시간 기독교에서 사용한 방식이고, 특히 자연신학 전통이 깊이 남아 있는 영국에서는 여전히 인기 있는 방식이다.

자연신학을 통한 신 존재 증명은 철학사에서 늘 한편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1920년대 이후 논리실증주의가 철학계를 뒤흔들면서 기독교 신앙은 옳고 그름을 떠나 아예 '무의미'(nonsense)한 명제로 공격을 받는다. 한동안 기독교 신앙은 지적 토대를 상실하게 되고 자신의 신앙을 변증할 동력을 잃어버렸다. 스윈번은 1960년대 이후 언어분석철학이 가장 활발하게 논의되던 옥스퍼드대학교에서 기독교 신앙의 합리성을 구축하기 위해 힘쓴다. 기독교를 공격하는 도구로 사용된 언어분석철학을 활용해 반대로 기독교를 옹호하는 도구로 사용한 것이다. 이는 영미권 여러 기독교 철학자에 의해 시도되었고, 이후 큰 반향을 일으키기도 했다.

스윈번은 유신론의 가정이 과학적 가정과 비슷한 것이라 여기며 개연성(probability)에 근거한 귀납 논증을 활용해 신 존재 증명을 시도한다. 쉽게 설명하자면, 어떤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여러 가설이 제기될 때, 그 가운데 배경 지식이 확실하고 누적된 증거가 충분한 가설이 가장 좋은 설명이 될 수 있다는 논증이다.

보통 과학철학에서 '최선의 설명으로의 추리'(inference to the best explanation)라고 알려진 방식으로 신 존재를 증명하는 것이다. 이는 어떤 현상을 설명하는 여러 이론 중에서 가장 좋은 설명을 제시하는 이론을 선택하여 진리로 믿는 행위를 가리키는 말이다. 스윈번은 하나님 존재를 증명하는 다양한 논증들, 즉 우주론적 논증, 목적론적 논증, 도덕적 논증이 종교적 경험으로부터 유래한 증거를 수반할 때,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개연적 명제로 만든다고 말한다. 유신론의 설명력이 다양한 논증이 누적되면서 점점 올라간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까지는 증거들에 의해 잘 지지되는 가설도 나중에 거짓이 될 가능성도 얼마든지 가지고 있다. 또 이렇게 확률이나 개연성에 근거해 종교적 믿음을 가지는 게 과연 정당한 것인지 물어볼 수도 있다. 하지만 믿음은 전부를 선택하든지 아니면 아예 전부를 포기하든지 하는 어떤 절대적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물론 이런 방식으로 선택을 강조하는 입장도 때로는 중요할 수 있다.) 우리가 어떤 믿음을 갖게 될 때, 그것이 100% 확실하기 때문에 받아들이는가, 아니면 신뢰성의 정도에 따라 상대적으로 선택을 하는 것인가? 스윈번은 자연신학의 후예답게 여러 증거와 증명을 통해 믿음의 신뢰도는 점차 높이는 방식으로 우리 신앙을 만들어 가자는 입장이다. 그러면서 유신론을 통해 세계를 설명하고 해석하는 것이 다른 방식(예를 들면, 유물론이나 인간주의)으로 세계를 해석하는 것보다 우월하다고 주장한다.

물리학과 화학에서 사용하는 공식과 용어를 살펴보면 우주가 굉장히 규칙적으로 움직이는 것 같지만, 사실 우주의 모든 사물은 복잡한 방법으로 움직이고 인간이 전혀 예측할 수 없는 방식으로 일한다. 이런 점에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규칙은 근사치에 관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사실 인간이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이러한 근사치를 높게 가지고 있어 세상이 어느 정도 규칙성으로 움직인다는 신념 때문이다. 규칙성을 통해 외부 세계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여기서 그 규칙성이 인간이 이해하기에 충분히 단순해야만 신념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다.

하나님은 우주의 모든 대상 속에 자연법칙을 따라 움직이는 경향성을 집어넣어 그 자연법칙이 작동하도록 하신다. 우주가 존재하는 것은 매 순간 하나님이 대상에게 이런 경향성을 갖고 존재하게 하기 때문이다. 유신론의 단순성은 합리적 개연성의 정도를 모든 현상에 기대하게끔 만든다. 다시 말하지만, 그는 하나님의 존재 사실이 그렇지 않을 경우보다 좀 더 개연성이 높다는 것을 보여 줄 뿐이다. 이 세상이 꼭 그렇게 존재해야만 할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다.

과학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과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우주에 대한 논리적 법칙과 원리를 제공한다. 문제는 과학은 사물의 존재 이유와 인간 존재의 이유를 모두 설명하기 어렵다는 사실이다. 결국 과학은 어느 지점에 가서 설명하기를 멈추어야 한다. 이는 과학 자체가 가지고 있는 설명의 한계 때문이다. 스윈번은 과학이 우주에 대한 합리적 설명을 제공해 준다 하더라도 우주의 본질과 존재의 이유와 같은 질문에 대해서는 설명할 수 없다고 말한다. 과학이 설명할 수 없는 부분에 이르러서는 인격적 설명이 필요한데 유신론이 바로 이런 설명을 제공할 수 있다. 유신론은 과학적 설명에 더해 인격적 설명을 제공할 수 있고, 이것이 설명의 힘을 한껏 올려 준다고 말한다.




지금까지 간략하게나마 스윈번의 기독교 철학을 소개했다. 스윈번의 논증을 좀 더 자세하게 알고 싶은 사람은 그의 기독교 철학 3부작(<The Coherence of Theism>, <The Existence of God>, <Faith and Reason>)을 봐야 할 것이다. 독특한 방식으로 기독교 신앙을 변호한 스윈번의 작업은 많은 이들에게 호감 혹은 반감을 가져다주었다. 여기에서는 언급하지 않았지만, 그는 오늘날 귀납 논증에서 중요하게 사용되는 '베이즈 정리'(Bayes’ theorem)를 통해 기독교 신앙을 옹호하려 한다. 하지만 한쪽에서는 이런 논증이 이성의 영역에 신앙을 어정쩡하게 배치해 이 둘의 관계를 어색하게 만들었다고 논박한다.

그는 <Faith and Reason>에서 "신앙은 증거의 충분성에 비례하고 그 안에서 힘을 얻는다"고 말한 바 있다. 스윈번에 따르면 신앙은 결국 증거에 대한 확고한 신념이다. 신념의 정도는 증거의 정도에 의존한다. 그러나 과연 기독교 신앙이 증거에 비례해야만 하는지를 한번 고려해 볼 문제다. 신앙의 신비를 굳이 과학적 증거와 확률로 모두 치환해야만 신앙의 근거가 마련되는 건 아니다. 별 이유 없이 그냥 믿고 싶어서 믿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스윈번의 기독교 철학이 남긴 업적과 공헌을 몇 가지 언급하고 싶다. 먼저 그는 오늘날 기독교 신학(자들)이 자연철학과 과학과 진지하게 대결하지 않고 은근슬쩍 다른 길로 도망치는 태도에 철퇴를 날린다. 스윈번은 증거주의자들이 제시하는 증명의 부담을 기꺼이 떠안으면서 문제를 정면으로 돌파한다. 그는 기독교의 합리성을 신앙의 영역으로 환원시키거나 증거주의자들이 제시하는 합리성의 기준과 다른 것으로 도피하지 않는다. 그들과 정면 승부를 하면서 기독교의 합리성을 보여 주고자 했다. 그는 철학의 영역에서 그리스도인이 공정한 법칙과 규칙을 사용해 신앙을 합리적으로 변증할 방법과 길을 닦아 주었다. 또한 그는 어떠한 신념이나 이론도 완벽하게 증명될 수 없다고 말하면서 소박한 실재론의 오류를 피해 간다.

기독교 신앙도 마찬가지다. 신을 향한 온전한 헌신과 전적인 신뢰 같은 것은 없다. 다만 우리에게 주어진 증거와 한계 내에서 조금씩 믿음의 개연성을 높여 갈 뿐이다. 때로는 의심하고 때로는 확신하면서 주어진 신념을 성실하게 쌓아 가는 것이 신앙의 길이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믿는 신앙은 맹목적 헌신과 추종으로 이어져 오히려 신앙에 해로울 수 있다. 찬찬히 하나씩 따져 가며 기초를 다지는 신앙이 오히려 흔들리지 않고 오래갈 수 있다. 스윈번에게 배울 수 있는 기독교 철학이란 이런 성실함이다.

 

 글_ 최경환 (과학과 신학의 대화 사무국장)

 * 이 글은 뉴스앤조이에 기고한 글입니다. 출처: http://www.newsnjoy.or.kr/news/articleView.html?idxno=300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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