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를 공경하는 신앙

과학과 신학의 대화
2021-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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래리 라스무쎈 | 지구를 공경하는 신앙 | 생태문명연구소 | 2017

 

 

신학자의 책임

 

라스무센이라는 이름을 처음 접하게 된 건 본회퍼를 공부하면서였다. 오래전 책이지만 그가 쓴 본회퍼 해설서(Dietrich Bonhoeffer: Reality and Resistance, 1972)는 상당히 인상적이었고, 이후 나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그의 책이 국내에 소개되지 않아 아쉬워하던 차에 우연히 이 책을 발견하고 바로 주문해서 읽었다. 국내에는 그리 많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미 미국에서는 영향력 있는 기독교윤리학자로 자리매김했고, 특별히 환경 윤리와 사회 정의에 관심을 두고 연구한 신학자로 알려졌다. 그는 1986년부터 2004년까지 유니언 신학대학(Union Theological Seminary)에서 라인홀드 니버 석좌 교수로 재직하다가 은퇴했다. 유니언신학대학은 라인홀드 니버와 디트리히 본회퍼가 가르쳤던 학교였고, 흑인신학의 대부인 제임스 콘과 한국신학자인 정현경 교수가 가르치는 학교이기도 하다. 그는 오랜 시간 WCC 위원으로 활동했고, 기독교윤리학회(Society of Christian Ethics)에서 회장직을 맡기도 했다. 

 

라스무센 교수가 구체적인 현실 문제에 관심을 보인 이유는, 그가 그동안 니버와 본회퍼를 꾸준히 연구해왔기 때문이다. 이 두 신학자는 추상적이고 보편적인 신학적 사유에 반대하면서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문제에 관심을 기울였다. 본회퍼는 “오늘 우리에게 그리스도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끊임없이 던지면서 신학이 현재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말했고, 니버 역시 기독교 현실주의를 주장하면서 미국 정치에 큰 영향을 끼쳤다. 

 

신학과 신학자는 누구를 위해 봉사해야 할까? 보수적인 신학자들은 ‘교회를 위해서’라고 말하겠지만, “자연 속에서 하나님의 현존과 능력”을 강조하는 신학자라면 ‘이 세상을 위해서’라고 말할 것이다. 세례를 받을 때 사용하는 물, 성찬식에서 사용하는 빵과 포도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제공한 자연의 성레전이다(437쪽). 조금만 상상력을 확장해 보면 우리의 영혼은 물과 곡식 그리고 근원적으로 이 땅과 깊은 연관이 있다. 하나님은 이 땅에서 자라는 빵과 포도주를 통해 인간과 만난다. 결국 모든 생명체는 하나로 연결된 존재(interbeing)이며, 자기 안으로 구부러진 자아에서 벗어나 서로주체성(intersubjectivity)으로 존재한다(495쪽). 하나님의 현실을 구체적으로 묵상하고 경험한 신학자는 자연스럽게 지구를 공경할 수밖에 없다. 

 

 

진보 신학 출판의 보루

 

신학 대학을 다니면서 신학책을 많이 읽기는 했지만 주로 리포트를 쓰기 위해 읽었고, 그것도 개혁파 신학이라는 특정한 관점에서 쓰인 책이 대부분이었다. 학교에서는 자유주의 신학에 대해 제대로 가르쳐주지도 않으면서 늘 비판만 했다. 하지만 학생 때는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는 법. 금서를 읽듯 틈틈이 진보적인 신학책들을 읽곤 했는데, 그때 주로 읽었던 책들은 공교롭게도 <한국기독교연구소> 책들이었다. 

 

그동안 <한국기독교연구소>는 역사적 예수에 관한 책뿐 아니라 진보적인 신학자들의 책을 국내에 소개하는 중요한 통로 역할을 했다. 이 출판사가 아니었다면 우리는 존 도미닉 크로산, 마커스 보그, 월터 윙크, 존 쉘비 스퐁과 같은 이들의 책을 어떻게 접할 수 있었겠는가? 그때 그 시절 <한국기독교연구소>에서 나온 책을 읽으며 가슴 벌렁이던 기억은 지금 생각해도 두근거린다. 비록 책 속 세상이었지만 신학이 어쩌면 새로운 세상을 만들 수도 있다는 기대로 한껏 고양되기도 했다. 

 

최근 ‘생태문명 시리즈’로 나온 세 권의 책은 모두 강력하게 추천하고 싶다. 1권은 생태영성 신학자로 잘 알려진 매튜 폭스의 <내 몸과 영혼의 지혜>라는 책이고, 2권이 래리 라스무센의 <지구를 공경하는 신앙>이다. 3권은 얼마 전에 출간된 울리히 두크로와 프란츠 힌켈라메르트의 <탐욕이냐 상생이냐>다. 이 책들은 모두 인간의 탐욕과 질주하는 자본주의에 제동을 걸고, 신학이 어떻게 새로운 세계상을 제시하는지 보여준다. 신학적 선언에 그치지 않고, 구체적인 실천과 대안을 제시하고 있어서 더 깊은 울림을 준다.  

 

3권 모두 한성수 목사님이 번역했다. 한성수 목사님이 번역한 책을 여러 권 읽어봤는데, 이분의 번역은 뭐랄까, 투박한듯하면서도 깊은 감동과 울림이 있다. 맛깔스러운 한글 표현을 잘 사용하셔서 저자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한층 업그레이드시켜준다. 어려운 출판 상황 속에서도 꾸준하게 책을 내고, 좋은 책을 골라 번역해 주니, 독자로서 너무나 감사할 따름이다. 

 



 

 

금욕주의적 윤리

 

오늘날 우리가 처한 환경위기는 충격적인 도표나 보고서를 보여주지 않아도 누구나 체감할 수 있다. 지속 불가능한 물질문명을 지속 가능한 생태 문명으로 바꾸지 않고, 하늘과 땅을 정성껏 돌보지 않는다면, 우리는 머지않아 공멸할 것이다. 무분별한 플라스틱 사용으로 말미암은 생태계 파괴와 미세먼지 공포는 삶 속 깊은 곳까지 들어와 우리를 위협하고 있다. 책임 윤리의 핵심은 지속 가능한 삶의 기반을 만들고, 다음 세대에게 안정적이고 더 좋은 세상을 물려주기 위해 노력이다. 라스무센은 생태 정의와 공적 제자도에 근거해 그리스도인들이 앞장서서 이 세상의 문화를 바꾸자고 독려한다. 히브리 예언서와 성서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은 바로 정의이고 이 정의는 “모든 생명이 완전히 가능한 번영”을 누리고, 그 “정의가 실현되기 전에는, 평화가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강조한다(514쪽). 정의 구현은 단순히 구호나 막연한 행동으로 이뤄지지 않는다. 권력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세심하게 살펴봐야 하고, 인종, 계급, 연령, 성별을 넘어서 생태 환경에까지 어떻게 조직되어 있는지를 봐야 한다. 결국 하나님의 정의는 “생명 공동체 전체에 영향을 주는 구조적인 죄”를 다뤄야 하고, 이것이 바로 공적 제자도의 과제다(519쪽).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논리나 지식이 아니다. 오히려 “공포와 사랑과 아름다움”에 대한 강렬한 경험이다(16쪽). 환경운동가들이나 다양한 비영리 기구들이 생태 정의를 위해 일하고 있지만, 굳이 종교가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종교는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변화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다. 비단 기독교뿐 아니라 유대교나 이슬람교 혹은 동양의 고대 종교들은 모두 인간의 욕망과 탐욕을 억제하고, 모든 것을 하나의 생명으로 연결해서 설명하려는 존재론을 가지고 있다(435쪽). 지구라는 공유지를 모든 종교가 함께 공유하고 있기 때문에 기독교는 공동선의 범위를 확장시켜 타 종교와도 연대할 수 있다. 

 

하지만 옳은 일을 위해 싸우고 투쟁하는 사람들이 조심해야 할 것이 있다. 고대 기독교 전통에서 생태정의를 실천했던 영성가들이 금욕주의적인 생활 방식을 택하고 세속 사회를 떠나 그들만의 공간으로 퇴거한 것은 단순히 그들이 세상에 저항한 행동이 아니다. 그들에겐 어떤 비장함이나 투지를 발견할 수 없다. 그저 자연 세계에서 영적인 거처를 찾아 “탐욕의 만족이 아니라, 더욱 깊은 자기의 필요의 만족”을 찾아 떠난 것이다(415쪽). “장소에 대한 예민한 감각과 사랑이 지역생활의 모든 특징과 조화를 이루어” 은총과 선물의 삶으로 들어간 것이다(416쪽). 적어도 그들에게 금욕주의는 억압이나 괴로움이 아니었다. 삶에 대한 긍정과 순화였으며, 봉사와 화해의 삶을 실천하기 위한 삶의 기술이었다. 이런 것이 진정한 금욕주의 윤리다(422쪽). 

 

  • 가볍게 여행하기: 우리는 언제나 우리가 상상한 것보다 더 적은 것으로 일을 처리할 수 있다. 
  • 내려놓기: 우리는 통제하려는 우리의 욕망을 단념하기를 배워야 한다.
  • 열어놓기: 우리는 결속을 하도록, 다시 결합하도록, 화해하도록 부름을 받았다. 
  • 부드러워지기: 어떻게 하면 우리의 공동체들이 덜 야만스럽고, 더 살기에 좋은 곳으로 만들 수 있을까? 
  • 가볍게 밝기: 우리의 환경에 상처를 주는 짓을 그만두어야 하고, 환경을 해치지 말아야 한다.
  • 단순하게 살기: 서로서로 사이의 그리고 우리의 환경과의 관계를 복잡하지 않게 하고, 소비를 덜하기
  • 간단히 살기: 살아남기 위해서 서로서로에 대해서 그리고 자연에 대해서 경쟁하지 않기

 

지구를 공경하는 신앙, 어렵지 않다. 조금 더 단순하게, 조금 더 불편하게, 조금 더 부드럽게, 조금 더 여유롭게 살면 된다. 인간은 움직이면 쓰레기가 나온다. 움직일 때마다 지구를 힘들게 한다. 그러니 가까운 사람에게 잘하면, 그게 지구를 돕는 길이다.  

 



 

 

거룩한 낯선 자들에게

 

언젠가 청파교회의 김기석 목사님은 자신이 두 번 회심했다고 말한 적이 있다. 하나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영적 회심이고, 다른 하나는 생태적 회심이라고 한다. 이 책을 읽고 나서 나도 비슷한 회심을 한 거 같다. 내 안에 숨어 있는 생명의 기운과 영적 감수성을 깨워줬다고 할까? (마흔 넘은 아재가 새삼스럽게) 갑자기 주변 사물과 환경 그리고 길가의 들풀 하나도 사랑스럽게 보이기 시작했다. 마치 고등부 시절 기도원에서 은혜를 받고 밖에 나오면 꽃들과 별들이 내게 말 거는 것 같은 기분? 암튼 좀 더 책임 있게 살고, 좀 더 주의 깊게 사물과 사람을 대해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됐다. 

 

영성신학과 정치신학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하나님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성령의 탄식을 몸으로 체현하는 그리스도인은 자연스럽게 세상을 향해 긍휼과 연민의 마음을 품게 된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강렬할수록 세상과의 갈등은 깊어지고 역설적으로 기쁨은 더욱 충만해진다. 이렇게 영성은 실천적 믿음과 결합하고, 세상 속에서 강렬한 대안적 세상을 꿈꾸게 된다. 죌레의 말처럼 하나님을 직접 체험한 사람들은 하나님을 거역하는 이 세상의 권력에 맞서 저항하는 힘을 얻게 된다. 만약 아직도 우리가 다른 세상이 가능하다는 강렬한 희망과 상상력을 갖지 못했다면, 다시 한번 우리의 신앙을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 

 

신비주의와 금욕주의는 세상을 등지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품기 위한 물러섬이다. “세속사회 속에서 거룩한 낯선 자들”(sacred strangers in secular society)로 살아가길 원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책은 든든한 영적 지원군이 될 것이다(609쪽). 기독교 영성에 깊이 뿌리 박으면서 뒤틀어진 이 세상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새로운 질서를 꿈꾸는 자들을 통해 새로운 세상이 열린 것이다.   

 

* 이 글은 <복음과 상황> 2020년 7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글 | 최경환 _ 과학과신학의대화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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