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에 다가서기
3. 성경과 모순된다는 오해를 넘어
글ㅣ우종학
서울대 교수
과학과 신학의 대화 대표
요즘 청소년들은 고등학교 과정에서 우주의 역사를 배운다. 흔히 ‘빅 히스토리 (big history)’라고 불리는 우주와 생명의 역사가 고등학교 과학 교과과정에 포함된 지 이미 오래되었다. 40대 이상 장년들은 과학 시간에 자연의 역사를 조금씩 접했던 반면, 우리의 아이들은 빅뱅과 우주의 진화를 자연스럽게 접한다. 정규 교육과정뿐만 아니라 대중 과학서와 유투브 등을 통해서 접하는 과학의 내용도 엄청나게 많다. 수십 년 전과 비교하면 전문적이고 깊이 있는 과학지식을 접하는 일이 너무나 쉬워졌다. 과학이 밝혀낸 ‘빅 히스토리’는 이제 우리 시대의 상식이 되었다.
©Billy Huynh, Unsplash
성서는 어떨까? 창세기 1, 2장에 담긴 창조세계의 모습은 현대 과학이 보여주는 우주의 모습과는 너무나 판이하게 다르다. 성서는 수천 년 전에 문자로 기록되어 변하지 않는 본문을 갖는다. 다만 성서의 본문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깊어지고 해석이 달라진다. 성서의 저자들이 살았던 그 당대의 상식과 개념, 그리고 어휘와 우주관을 담고 있는 창세기 1,2장이 현대 과학과 불일치하고 서로 모순되는 건 어쩌면 너무나 당연하다.
창세기 1, 2장을 천지창조에 대한 과학적 설명으로 잘못 읽으면 심각한 오류에 빠진다. 창세기가 하나님이 만물을 만드신 연대나 기간, 순서 혹은 방법을 설명하면서 과학적인 정보를 제공한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현대 과학을 배운 현대인이 창세기 1, 2장을 과학 교과서처럼 읽으면 성경과 과학이 서로 모순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고, 성경이 옳거나 혹은 과학이 옳거나, 양자택일의 불행한 상황으로 내몰리게 된다.
창조주 하나님을 신앙하는 그리스도인들이 과학에 다가서기 위해서는 과학에 대한 적대감을 넘고 두려움을 극복해야 할 뿐만 아니라, 성서를 어떻게 읽어야 할지, 특히 창세기 1, 2장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제대로 배워야 한다. 과학과 성경이 모순된다는 오해를 풀지 않으면 우리는 과학에 다가설 수 없다.
©Mikołaj, Unsplash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았지만, 우리를 위한 책.
현대 과학과 관련해서 중요한 본문은 창세기 1, 2장을 비롯한 창조 기사들이다. 창조 기사를 읽을 때 우리가 염두에 두어야 하는 중요한 원칙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성서가 우리에게 주어진 책이 아니라는 점이다. 우리를 독자로 염두에 두고 쓴 책이 아니라, 성서가 쓰여지던 그 시대 사람들을 1차 독자로 염두에 두고 쓰여진 책이라고 구약학자들은 일관되게 가르치고 있다. 물론, 우리에게 직접 주어진 책은 아니지만, 성서는 여전히 우리를 위해 하나님께서 주신 책이다. 영어로는 ‘not to us, but for us’라고 흔히들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현대인들이 성서를 읽을 때는 1차 독자였던 고대 히브리인들이 그 본문을 어떻게 읽고 이해했을지를 탐구하면서 읽어야 한다. 본문에 나오는 다양한 표현들이 그들에게 어떤 의미였을지, 본문의 묘사와 설명은 어떤 메시지를 의도하고 있는지 알아야 한다. 그러고 나서 고대 근동 지역의 히브리인들이 이해했던 그 메시지가 오늘날 우리에게는 어떤 의미가 있으며 그 본문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시려는 말씀이 무엇인지 해석해야 한다.
창세기의 1차 독자였던 히브리인들을 포함하여 고대 근동 지역 사람들은 어떤 우주관을 갖고 있었을까? 현대인들과 다르게 그들은 우주가 팽창하는 것도, 우주의 역사가 장구하다는 사실도, 지구가 수십억 년 전에 생성되었다는 사실도 전혀 몰랐다. 인간의 눈에 보이는 그대로 그들은 땅(지구)이 편평하고 바다에 둘러싸여 있으며 움직이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지구는 우주의 중심에 있고 해와 달과 별들은 궁창에 있으며, 지구는 고정되어 있는 반면, 하늘이 지구를 중심으로 돌고 있다고 생각했다. 궁창의 의미는 명확하지는 않지만 어떤 딱딱한 층에 해와 달과 별들이 붙어 있고 그 거대한 천구(하늘)가 하루에 한 번씩 회전하는 것으로 그들은 이해했다. 우리에게 익숙한 천동설의 우주와 비슷하다. 해와 달과 별들이 있는 하늘이 회전을 하기 때문에 고대 근동 사람들이 생각했던 우주의 크기는 매우 작았다. 우주가 너무 크다면, 하루에 한 바퀴씩 돌기 위해서 회전속도가 무지막지하게 빨라야 하기 때문이다. 고대 히브리인들의 우주는 현대인들이 알고 있는 우주와 판이하게 다르다는 것은 너무나 명확하다.
창세기에는 비과학적인 내용이 들어있을까?
질문을 먼저 던져 보자. 창세기 1장에는 비과학적인 내용이 들어 있을까? 즉, 현대 과학과는 모순되는 내용이 담겨있을까? 물론이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자. 궁창 위에 물층이 있다는 것이 그 당대의 상식이었다. 하늘에서 내리는 비는 궁창의 문이 열리고 그 위에 있던 물이 땅으로 떨어지는 것으로 이해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고대 근동의 우주관을 가진 히브리인들에게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 어떻게 하셨을까?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설명하지 않으셨을까? 성경도 그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기록해서 주시지 않았을까?
그래서 창세기 1장에는 고대 히브리인들의 상식과 우주관이 담겨있다. 가령, 하나님께서 궁창을 만드시고 궁창 위의 물과 궁창 아래의 물로 나누셨다는 표현이 창세기 1장에 나오는데 이것은 고대 근동의 상식이 반영된 표현이다. 하지만 창세기 1장 본문의 핵심 메시지는 하나님이 창조주라는 것이다. 궁창 위의 물층을 만들었다는 것은 성서가 현대인들에게 알려주는 과학적 정보가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주임을 고대 히브리인들에게 가르쳐 주기 위해 사용된 그릇과 같은 도구이다.
궁창 위에 물층이 있다고 생각했던 히브리인들에게 하나님이 창조주임을 선언하면서 그들이 생각하는 우주의 모습 하나하나를 하나님이 지으셨다고 기록하고 있는 창세기 1장이 주어졌다. 고대 히브리인들은 자신들이 생각하는 우주의 모습을 그대로 하나님이 하나하나 만들었다고 이해할 수 있었다. 창세기 1장에는 고대 근동의 상식이 담겨있지만 그 상식은 성경이 전하려는 메시지가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주임을 이해할 수 있도록 사용된 도구이다.
©Ben White, Unsplash
독자의 눈높이에 맞게 주신 말씀
종교개혁자 존 칼빈은 성서가 라틴어를 읽을 수 있는 학자들을 위한 책이 아니라, 누구라도 읽고 이해할 수 있도록 평범한 사람들에게 주어진 책이라고 설명했다. 일반적인 상식을 가진 사람이 읽어도 어떤 내용인지 이해할 수 있도록 쓰여진 책이라는 말이다. 창세기 1장을 접한 고대 히브리인들은 자신들이 알고 있던 땅과 궁창과 궁창 위의 물을 비롯한 천지만물이 다 하나님의 창조의 작품이라는 메시지를 쉽게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다. 어린아이에게 뭔가를 설명할 때는 그 아이가 이해할 수 있도록 아이의 눈높이에 맞게 설명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칼뱅이 얘기한 적응론(accommodation)이다.
만일 창세기 1장이 오늘 다시 쓰여진다면 어떻게 기록될까? 하나님이 빅뱅을 일으키시고 우주를 팽창시키며 백억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천억 개 이상의 별들을 가진 은하들을 천억 개 이상 창조하셨다고 하지 않겠는가? 오늘날 누구나 아는 상식이 된 그 빅 히스토리의 내용 하나하나가 하나님이 창조하신 과정이라고 성경이 기록하지 않겠는가?
성경에는 고대 근동의 상식이 들어있고 그 상식은 현대 과학의 관점으로 보면 비과학적일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창세기 1장이 거짓이나 허구라는 뜻은 아니다. 창세기의 1차 독자였던 고대 히브리인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그들의 상식과 우주관에 맞게 주어졌을 뿐이다. 만일 21세기 현대 과학의 내용을 담아 하나님의 창조 과정을 묘사했더라면 그 당시에는 아무도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 당대의 상식에 맞게 성경이 주어진 것은 오히려 하나님의 창조주 되심을 이해할 수 있도록 눈높이에 맞게 주신 것으로 하나님의 사랑과 배려에 해당한다.
이렇게 가정해 보자. 2024년 현재의 과학과 모순되지 않게 창세기 1장이 쓰여졌다면 어떨까? 그렇다면 우리의 관점에서는 창세기 1장과 과학이 서로 잘 일치하기 때문에 성경과 과학 사이에 어떤 문제도 없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과학은 빠르게 변한다. 100-200년 뒤에 과학은 어떻게 달라져 있을까? 과학이 훨씬 더 발전했을 200년 후에 2024년을 돌아보면 우리가 지금 논하는 현대 과학이 매우 우습지 않을까? 창세기 1장이 지금의 과학과 잘 일치한다고 해서, 200년 뒤에도 모순되지 않는 상태로 남아있을 수 있을까?
성경을 과학과 조화시키려는 시도는 답이 없다. 바람직하지도 않다. 성경은 과학 정보를 담은 과학 교과서가 아니다. 성경은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책이 아니며 고대 근동의 상식을 담고 있다. 현대 과학의 입장에서 보면 비과학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그 상식이 성서에 담겨있다는 사실은, 오히려 고대 히브리인들이 성경을 읽고 누가 창조주인지 깨달을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배려해 주신 놀라운 은혜다. 신의 지위를 버리고 인간이 되기까지 자기를 낮추셨듯이, 하나님의 놀라운 창조 역사를 다 이해할 수 없는 우리의 한계를 긍휼히 여기시고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언어와 상식으로 하나님의 창조주 되심을 드러내는 성육신적 계시가 바로 성서다. 그러니 우리는 성경과 과학이 모순된다는 오해를 넘어 성경을 그 의도에 맞게 바르게 읽고 해석해야 한다. 성경의 권위로 과학을 부정하는 대신에 성경에 대한 나의 해석을 돌아보고 하나님이 주신 말씀의 핵심을 잘 이해하고 받아야 한다.
과학에 다가서기
3. 성경과 모순된다는 오해를 넘어
글ㅣ우종학
서울대 교수
과학과 신학의 대화 대표
요즘 청소년들은 고등학교 과정에서 우주의 역사를 배운다. 흔히 ‘빅 히스토리 (big history)’라고 불리는 우주와 생명의 역사가 고등학교 과학 교과과정에 포함된 지 이미 오래되었다. 40대 이상 장년들은 과학 시간에 자연의 역사를 조금씩 접했던 반면, 우리의 아이들은 빅뱅과 우주의 진화를 자연스럽게 접한다. 정규 교육과정뿐만 아니라 대중 과학서와 유투브 등을 통해서 접하는 과학의 내용도 엄청나게 많다. 수십 년 전과 비교하면 전문적이고 깊이 있는 과학지식을 접하는 일이 너무나 쉬워졌다. 과학이 밝혀낸 ‘빅 히스토리’는 이제 우리 시대의 상식이 되었다.
©Billy Huynh, Unsplash
성서는 어떨까? 창세기 1, 2장에 담긴 창조세계의 모습은 현대 과학이 보여주는 우주의 모습과는 너무나 판이하게 다르다. 성서는 수천 년 전에 문자로 기록되어 변하지 않는 본문을 갖는다. 다만 성서의 본문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깊어지고 해석이 달라진다. 성서의 저자들이 살았던 그 당대의 상식과 개념, 그리고 어휘와 우주관을 담고 있는 창세기 1,2장이 현대 과학과 불일치하고 서로 모순되는 건 어쩌면 너무나 당연하다.
창세기 1, 2장을 천지창조에 대한 과학적 설명으로 잘못 읽으면 심각한 오류에 빠진다. 창세기가 하나님이 만물을 만드신 연대나 기간, 순서 혹은 방법을 설명하면서 과학적인 정보를 제공한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현대 과학을 배운 현대인이 창세기 1, 2장을 과학 교과서처럼 읽으면 성경과 과학이 서로 모순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고, 성경이 옳거나 혹은 과학이 옳거나, 양자택일의 불행한 상황으로 내몰리게 된다.
창조주 하나님을 신앙하는 그리스도인들이 과학에 다가서기 위해서는 과학에 대한 적대감을 넘고 두려움을 극복해야 할 뿐만 아니라, 성서를 어떻게 읽어야 할지, 특히 창세기 1, 2장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제대로 배워야 한다. 과학과 성경이 모순된다는 오해를 풀지 않으면 우리는 과학에 다가설 수 없다.
©Mikołaj, Unsplash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았지만, 우리를 위한 책.
현대 과학과 관련해서 중요한 본문은 창세기 1, 2장을 비롯한 창조 기사들이다. 창조 기사를 읽을 때 우리가 염두에 두어야 하는 중요한 원칙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성서가 우리에게 주어진 책이 아니라는 점이다. 우리를 독자로 염두에 두고 쓴 책이 아니라, 성서가 쓰여지던 그 시대 사람들을 1차 독자로 염두에 두고 쓰여진 책이라고 구약학자들은 일관되게 가르치고 있다. 물론, 우리에게 직접 주어진 책은 아니지만, 성서는 여전히 우리를 위해 하나님께서 주신 책이다. 영어로는 ‘not to us, but for us’라고 흔히들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현대인들이 성서를 읽을 때는 1차 독자였던 고대 히브리인들이 그 본문을 어떻게 읽고 이해했을지를 탐구하면서 읽어야 한다. 본문에 나오는 다양한 표현들이 그들에게 어떤 의미였을지, 본문의 묘사와 설명은 어떤 메시지를 의도하고 있는지 알아야 한다. 그러고 나서 고대 근동 지역의 히브리인들이 이해했던 그 메시지가 오늘날 우리에게는 어떤 의미가 있으며 그 본문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시려는 말씀이 무엇인지 해석해야 한다.
창세기의 1차 독자였던 히브리인들을 포함하여 고대 근동 지역 사람들은 어떤 우주관을 갖고 있었을까? 현대인들과 다르게 그들은 우주가 팽창하는 것도, 우주의 역사가 장구하다는 사실도, 지구가 수십억 년 전에 생성되었다는 사실도 전혀 몰랐다. 인간의 눈에 보이는 그대로 그들은 땅(지구)이 편평하고 바다에 둘러싸여 있으며 움직이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지구는 우주의 중심에 있고 해와 달과 별들은 궁창에 있으며, 지구는 고정되어 있는 반면, 하늘이 지구를 중심으로 돌고 있다고 생각했다. 궁창의 의미는 명확하지는 않지만 어떤 딱딱한 층에 해와 달과 별들이 붙어 있고 그 거대한 천구(하늘)가 하루에 한 번씩 회전하는 것으로 그들은 이해했다. 우리에게 익숙한 천동설의 우주와 비슷하다. 해와 달과 별들이 있는 하늘이 회전을 하기 때문에 고대 근동 사람들이 생각했던 우주의 크기는 매우 작았다. 우주가 너무 크다면, 하루에 한 바퀴씩 돌기 위해서 회전속도가 무지막지하게 빨라야 하기 때문이다. 고대 히브리인들의 우주는 현대인들이 알고 있는 우주와 판이하게 다르다는 것은 너무나 명확하다.
창세기에는 비과학적인 내용이 들어있을까?
질문을 먼저 던져 보자. 창세기 1장에는 비과학적인 내용이 들어 있을까? 즉, 현대 과학과는 모순되는 내용이 담겨있을까? 물론이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자. 궁창 위에 물층이 있다는 것이 그 당대의 상식이었다. 하늘에서 내리는 비는 궁창의 문이 열리고 그 위에 있던 물이 땅으로 떨어지는 것으로 이해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고대 근동의 우주관을 가진 히브리인들에게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 어떻게 하셨을까?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설명하지 않으셨을까? 성경도 그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기록해서 주시지 않았을까?
그래서 창세기 1장에는 고대 히브리인들의 상식과 우주관이 담겨있다. 가령, 하나님께서 궁창을 만드시고 궁창 위의 물과 궁창 아래의 물로 나누셨다는 표현이 창세기 1장에 나오는데 이것은 고대 근동의 상식이 반영된 표현이다. 하지만 창세기 1장 본문의 핵심 메시지는 하나님이 창조주라는 것이다. 궁창 위의 물층을 만들었다는 것은 성서가 현대인들에게 알려주는 과학적 정보가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주임을 고대 히브리인들에게 가르쳐 주기 위해 사용된 그릇과 같은 도구이다.
궁창 위에 물층이 있다고 생각했던 히브리인들에게 하나님이 창조주임을 선언하면서 그들이 생각하는 우주의 모습 하나하나를 하나님이 지으셨다고 기록하고 있는 창세기 1장이 주어졌다. 고대 히브리인들은 자신들이 생각하는 우주의 모습을 그대로 하나님이 하나하나 만들었다고 이해할 수 있었다. 창세기 1장에는 고대 근동의 상식이 담겨있지만 그 상식은 성경이 전하려는 메시지가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주임을 이해할 수 있도록 사용된 도구이다.
©Ben White, Unsplash
독자의 눈높이에 맞게 주신 말씀
종교개혁자 존 칼빈은 성서가 라틴어를 읽을 수 있는 학자들을 위한 책이 아니라, 누구라도 읽고 이해할 수 있도록 평범한 사람들에게 주어진 책이라고 설명했다. 일반적인 상식을 가진 사람이 읽어도 어떤 내용인지 이해할 수 있도록 쓰여진 책이라는 말이다. 창세기 1장을 접한 고대 히브리인들은 자신들이 알고 있던 땅과 궁창과 궁창 위의 물을 비롯한 천지만물이 다 하나님의 창조의 작품이라는 메시지를 쉽게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다. 어린아이에게 뭔가를 설명할 때는 그 아이가 이해할 수 있도록 아이의 눈높이에 맞게 설명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칼뱅이 얘기한 적응론(accommodation)이다.
만일 창세기 1장이 오늘 다시 쓰여진다면 어떻게 기록될까? 하나님이 빅뱅을 일으키시고 우주를 팽창시키며 백억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천억 개 이상의 별들을 가진 은하들을 천억 개 이상 창조하셨다고 하지 않겠는가? 오늘날 누구나 아는 상식이 된 그 빅 히스토리의 내용 하나하나가 하나님이 창조하신 과정이라고 성경이 기록하지 않겠는가?
성경에는 고대 근동의 상식이 들어있고 그 상식은 현대 과학의 관점으로 보면 비과학적일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창세기 1장이 거짓이나 허구라는 뜻은 아니다. 창세기의 1차 독자였던 고대 히브리인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그들의 상식과 우주관에 맞게 주어졌을 뿐이다. 만일 21세기 현대 과학의 내용을 담아 하나님의 창조 과정을 묘사했더라면 그 당시에는 아무도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 당대의 상식에 맞게 성경이 주어진 것은 오히려 하나님의 창조주 되심을 이해할 수 있도록 눈높이에 맞게 주신 것으로 하나님의 사랑과 배려에 해당한다.
이렇게 가정해 보자. 2024년 현재의 과학과 모순되지 않게 창세기 1장이 쓰여졌다면 어떨까? 그렇다면 우리의 관점에서는 창세기 1장과 과학이 서로 잘 일치하기 때문에 성경과 과학 사이에 어떤 문제도 없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과학은 빠르게 변한다. 100-200년 뒤에 과학은 어떻게 달라져 있을까? 과학이 훨씬 더 발전했을 200년 후에 2024년을 돌아보면 우리가 지금 논하는 현대 과학이 매우 우습지 않을까? 창세기 1장이 지금의 과학과 잘 일치한다고 해서, 200년 뒤에도 모순되지 않는 상태로 남아있을 수 있을까?
성경을 과학과 조화시키려는 시도는 답이 없다. 바람직하지도 않다. 성경은 과학 정보를 담은 과학 교과서가 아니다. 성경은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책이 아니며 고대 근동의 상식을 담고 있다. 현대 과학의 입장에서 보면 비과학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그 상식이 성서에 담겨있다는 사실은, 오히려 고대 히브리인들이 성경을 읽고 누가 창조주인지 깨달을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배려해 주신 놀라운 은혜다. 신의 지위를 버리고 인간이 되기까지 자기를 낮추셨듯이, 하나님의 놀라운 창조 역사를 다 이해할 수 없는 우리의 한계를 긍휼히 여기시고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언어와 상식으로 하나님의 창조주 되심을 드러내는 성육신적 계시가 바로 성서다. 그러니 우리는 성경과 과학이 모순된다는 오해를 넘어 성경을 그 의도에 맞게 바르게 읽고 해석해야 한다. 성경의 권위로 과학을 부정하는 대신에 성경에 대한 나의 해석을 돌아보고 하나님이 주신 말씀의 핵심을 잘 이해하고 받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