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에 다가서기
4. 신인동형의 한계 너머로
글ㅣ우종학
서울대 교수
과학과 신학의 대화 대표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이 과학을 창조의 역사를 드러내는 도구로 품으려면 과학에 대한 적대감과 두려움을 넘어야 하며 성경해석 오류를 극복해야 한다는 점을 지난 세 편의 글에서 다루었다. 하지만 이 세 가지 보다 어쩌면 더 근본적인 숙제는 신인동형으로 표현된 제한된 신관을 극복하는 일이다.
누군가를 처음 만날 때 그가 어떤 사람이고 어떤 모습이고 어떤 일을 하는지 궁금하듯이, 하나님과의 사귐이며 그분을 알아가는 과정에서 그리스도인 모두는 하나님에 관해 묻고 답하려고 한다. 구원자 하나님뿐만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의 면모에 관해서도 그분이 어떻게 우주를 창조하고 섭리하는지 알아가는 일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너무나 당연하다. 하지만 우리는 얼마나 하나님을 이해할 수 있을까? 창조에 관해 우리는 얼마나 많은 것을 알아낼 수 있을까? 분명한 점은 인간의 지성으로 하나님을 다 이해할 수 없고 우리의 인지는 너무나 명백한 한계를 갖는다는 점이다.
아이들이 부모를 그린 그림을 보면 그들이 부모를 어떻게 인지하고 이해하는지 알 수 있다. 직장 일로 항상 바쁘고 놀아주지 않는 아빠는 한쪽 구석에 그린다거나 자주 혼내는 엄마의 얼굴은 화난 표정으로 그린다거나 화목한 가정이라면 온 가족이 밝고 환한 모습으로 그리기도 한다. 용돈을 잘 주지 않는 아빠는 돈이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게임을 못 하게 하는 엄마를 보며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아이들은 그들의 눈으로 부모를 보고 그들의 인지의 한계 안에서 부모를 이해한다. 하나님에 대한 우리 인간의 이해도 마찬가지다. 창조주 하나님이 어떻게 만물을 창조했는지 묻는다면 우리는 어떻게 답할까? 아마도 우리는 아이들이 부모를 이해하는 수준보다 훨씬 더 조금 창조에 관해 알고 있을 뿐이다.
신인동형
하나님은 손가락도 없고 목소리도 없으며 에덴동산을 거닐 다리도 없다. 성서는 종종 하나님을 불꽃이나 바람처럼 묘사하지만 하나님은 불꽃도 바람도 아니다. 예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성육신하기 전까지 하나님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나님은 인간의 눈으로 볼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그분은 쿼크와 원자로 구성된 자연세계의 일부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만나고 그의 말씀을 듣고 그의 섭리와 역사를 경험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계시해 주신 말씀은 인간의 언어로 기록되었고 그래서 성경에 담긴 하나님은 마치 인간처럼 묘사된다. 그렇게 묘사하는 방식을 신인동형(anthropo-morphic)이라고 한다. 창조주 하나님께 인간의 모습을 입혀서 표현하고 이해하는 방식이다. 하나님이 무언가를 창조하는 과정을 기록할 때도 마찬가지다. 마치 우리 인간이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것처럼 하나님의 창조를 신인동형적으로 기록한다.
가령, 흙으로 사람을 지으사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는다는 표현도 정확히 신인동형적이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처럼 흙을 빚어낼 손도 생기를 불어넣은 폐와 입도 갖고 있지 않다. 창세기 1장 3절에 ‘빛이 있으라’고 말씀하신 구절도 하나님이 목젖을 울려서 음성을 내고 그 소리가 퍼졌다는 뜻이 아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의지에 만물이 즉각적으로 순종하는 창조주의 전능하심을 드러내는 말씀이다.
@Sixteen Miles Out, Unsplash
곰곰이 생각해 보자. 인간의 언어로 하나님을 얼마나 표현하고 기술할 수 있을까? 하나님의 창조 과정을 얼마나 명확하게 담아낼 수 있을까? 인간의 언어로 하나님의 창조 과정을 기술한다면 마치 어린아이가 부모의 그림을 그려내는 수준 보다 못하지 않을까? 언어는 인간의 경험에 의해 만들어진다. 언어는 각 시대의 문화와 상식에 의존하며 그 시대의 지성과 인지의 한계에 종속된다. 그 시대에 존재하지 않는 개념들이라면 표현할 어휘조차도 없다.
즉각적 완성된 창조 (creatio de novo)
창세기는 고대 근동 지역에 살았던 히브리인들의 언어로 기록되었음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그 시대는 지구는 편평하고 땅 위에 궁창이 있으며 궁창 위에 신의 세계가 있다는 상식이 지배했다. 현대 과학에서 다루는 복잡한 개념들은 아예 존재하지도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에 담긴 창조주 하나님은 고대 근동인들이 그들의 인지의 한계 안에서 이해했고 그들의 제한된 언어로 묘사하고 기록한 신인동형의 하나님이다.
고대 근동의 언어에서 드러나는 특징 중 하나는 즉각적이고 완성된 창조(creation de novo) 개념이다. 현대 과학을 배운 우리는 시간적 과정을 거쳐 원인과 결과가 사슬처럼 이어지는 동적인 과정을 배웠다. 물이 증발해서 수증기가 되고 구름이 되었다가 땅에 비가 내리는 과정, 바다가 침식을 일으켜 해안선이 변하고 육지가 깎여 나가는 과정, 공룡이 멸종하고 코로나19 바이러스가 등장하여 퍼지는 생물의 다양성이 증가하는 과정 등 우리는 창조세계를 현대인의 관점에서 동적인 과정으로 이해한다.
하지만 고대 근동인들은 창조의 과정을 즉각적이고 완성된 형태로 만드는 과정으로 주로 이해했다. 그래서 하나님의 창조를 기술한 창세기 1장을 읽어보면 창조주가 무언가를 만들 때 즉각적으로 피조물이 만들어지고 그 피조물은 완성된 형태로 새로움을 드러낸다. 물론 창세기 1장 11절에는 땅이 풀과 채소와 나무를 내라고 명령하는 표현도 있다. 이 표현은 어떤 시간적 과정을 거쳐서 땅에서 식물이 자라나는 과정을 묘사한다고 이해할 수 있으며 고대 근동인들이 동적이고 시간적 과정을 전혀 몰랐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들은 창조주 하나님이 한 번에 완성된 모습으로 피조물들을 창조했다고 이해했다. 창세기 1장에 나오는 6일의 창조 주간은 그렇게 즉각적이고 완성된 모습으로 창조하는 과정을 기록한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고대 히브리들이 이해한 방식으로 만물을 창조했을까? 하나님이 만물의 창조주이심을 성경은 명확히 선언한다. 하지만 하나님이 우주를 창조하는 과정과 방식을 고대 근동인들의 이해했던 그 한계 안에 가두어 두는 오류는 극복해야 한다. 성경은 문자적으로 즉각적이고 완성된 형태로 창조하는 과정을 묘사하지만 그것은 신인동형적 표현일 뿐만 아니라 고대 근동인들이 가졌던 제한된 개념과 어휘와 언어로 표현된 어린아이의 그림과 같다. 부모의 사랑을 받고 자라나는 아이가 부모의 모습을 그린 그림이 거짓이 아니듯, 고대 히브리인의 제한된 언어에 담겨 신인동형적으로 묘사된 창조 기사는 진리를 담고 있다. 하지만 어린아이의 그림으로 부모의 참모습을 제한해서는 안 되듯이, 전능한 창조주의 모습을 끌어내려 고대인들의 언어와 개념에 가두어서는 안 된다.

@logos bible software
출애굽 이후 모세가 시내산으로 십계명을 받으러 올라 간 지 40일이 지났지만 아무 소식이 없었다. 시내산 아래서 기다리던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를 기다리다가 결국 금붙이를 모아서 금송아지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 금송아지를 향해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낸 신’이라고 부르며 경배했다. 보이지 않던 하나님, 불과 구름 기둥으로 임하던 하나님, 그리고 그 하나님을 대리하던 모세가 행방불명 되었을 때 기다림에 지친 그들은 스스로 신을 만들어 낼 수밖에 없었다. 보이지 않고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 우리의 언어로 묘사되지 않는 하나님, 우리의 지성으로 파악되지 않는 하나님은 종종 우리를 두려움에 쌓이게 한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생각대로 우리의 언어로 우리의 입맛에 맞게 하나님은 이런 분이라고 규정하고 제한하고 그렇게 엉뚱한 하나님의 형상을 만들어 내는지도 모른다. 이스라엘 백성이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낸 신이라고 불렀던 그 금송아지처럼 우리는 끝없이 신의 형상을 만들어낸다. 성경은 하나님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인간을 창조했다고 증언하지만, 반대로 우리는 우리의 모습대로 하나님을 만들어낸다. 그것이 바로 우상숭배다.
@NASA
현대 과학으로 이해한 창조는 어떨까? 고대 근동인들의 즉각적이고 완성된 창조의 개념과 달리 우리는 우주의 빅 히스토리를 통해 100억 년이 넘는 긴 시간적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이 창조세계에 부여한 자연법칙을 섭리하고 역사하심으로 우주와 지구와 인간을 창조하셨다고 이해한다. 그러나 주의할 점은 우리가 지금 갖고 있는 창조주 하나님의 모습도 여전히 신인동형적이고 우리 시대의 언어와 개념과 지성의 한계 안에서 표현되고 이해되는 하나님의 모습이라는 점이다. 과학은 인간이 자연세계를 이해하는 과정이며 과학은 완성된 것이 아니라 점진적으로 실재에 근사하는 과정이다. 그 과학을 통해 하나님의 창조를 이해하려는 현대 그리스도인들의 노력도 결국 오늘날 우리의 지성과 인지의 한계를 넘을 수는 없다. 비록 수천 년 전 고대 근동인들의 지성과 인지보다는 훨씬 고급스럽고 깊이가 있다고 해도 여전히 우리가 이해하는 하나님의 창조는 한계를 갖는다.
하나님을 창조주로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결국 우리가 창조주를 이해하는 방식은 신인동형적이고 우리 시대의 한계에 제한된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은 성경에 기록된 제한된 문자와 언어를 넘어 그리고 우리 인간의 지성을 넘어 그리고 현대 과학의 놀라운 성과로도 다 담을 수 없는 위대한 창조주임을 기억하고 고백하고 신앙해야 한다.
과학에 다가서기
4. 신인동형의 한계 너머로
글ㅣ우종학
서울대 교수
과학과 신학의 대화 대표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이 과학을 창조의 역사를 드러내는 도구로 품으려면 과학에 대한 적대감과 두려움을 넘어야 하며 성경해석 오류를 극복해야 한다는 점을 지난 세 편의 글에서 다루었다. 하지만 이 세 가지 보다 어쩌면 더 근본적인 숙제는 신인동형으로 표현된 제한된 신관을 극복하는 일이다.
누군가를 처음 만날 때 그가 어떤 사람이고 어떤 모습이고 어떤 일을 하는지 궁금하듯이, 하나님과의 사귐이며 그분을 알아가는 과정에서 그리스도인 모두는 하나님에 관해 묻고 답하려고 한다. 구원자 하나님뿐만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의 면모에 관해서도 그분이 어떻게 우주를 창조하고 섭리하는지 알아가는 일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너무나 당연하다. 하지만 우리는 얼마나 하나님을 이해할 수 있을까? 창조에 관해 우리는 얼마나 많은 것을 알아낼 수 있을까? 분명한 점은 인간의 지성으로 하나님을 다 이해할 수 없고 우리의 인지는 너무나 명백한 한계를 갖는다는 점이다.
신인동형
하나님은 손가락도 없고 목소리도 없으며 에덴동산을 거닐 다리도 없다. 성서는 종종 하나님을 불꽃이나 바람처럼 묘사하지만 하나님은 불꽃도 바람도 아니다. 예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성육신하기 전까지 하나님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나님은 인간의 눈으로 볼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그분은 쿼크와 원자로 구성된 자연세계의 일부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만나고 그의 말씀을 듣고 그의 섭리와 역사를 경험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계시해 주신 말씀은 인간의 언어로 기록되었고 그래서 성경에 담긴 하나님은 마치 인간처럼 묘사된다. 그렇게 묘사하는 방식을 신인동형(anthropo-morphic)이라고 한다. 창조주 하나님께 인간의 모습을 입혀서 표현하고 이해하는 방식이다. 하나님이 무언가를 창조하는 과정을 기록할 때도 마찬가지다. 마치 우리 인간이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것처럼 하나님의 창조를 신인동형적으로 기록한다.
가령, 흙으로 사람을 지으사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는다는 표현도 정확히 신인동형적이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처럼 흙을 빚어낼 손도 생기를 불어넣은 폐와 입도 갖고 있지 않다. 창세기 1장 3절에 ‘빛이 있으라’고 말씀하신 구절도 하나님이 목젖을 울려서 음성을 내고 그 소리가 퍼졌다는 뜻이 아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의지에 만물이 즉각적으로 순종하는 창조주의 전능하심을 드러내는 말씀이다.
곰곰이 생각해 보자. 인간의 언어로 하나님을 얼마나 표현하고 기술할 수 있을까? 하나님의 창조 과정을 얼마나 명확하게 담아낼 수 있을까? 인간의 언어로 하나님의 창조 과정을 기술한다면 마치 어린아이가 부모의 그림을 그려내는 수준 보다 못하지 않을까? 언어는 인간의 경험에 의해 만들어진다. 언어는 각 시대의 문화와 상식에 의존하며 그 시대의 지성과 인지의 한계에 종속된다. 그 시대에 존재하지 않는 개념들이라면 표현할 어휘조차도 없다.
즉각적 완성된 창조 (creatio de novo)
창세기는 고대 근동 지역에 살았던 히브리인들의 언어로 기록되었음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그 시대는 지구는 편평하고 땅 위에 궁창이 있으며 궁창 위에 신의 세계가 있다는 상식이 지배했다. 현대 과학에서 다루는 복잡한 개념들은 아예 존재하지도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에 담긴 창조주 하나님은 고대 근동인들이 그들의 인지의 한계 안에서 이해했고 그들의 제한된 언어로 묘사하고 기록한 신인동형의 하나님이다.
고대 근동의 언어에서 드러나는 특징 중 하나는 즉각적이고 완성된 창조(creation de novo) 개념이다. 현대 과학을 배운 우리는 시간적 과정을 거쳐 원인과 결과가 사슬처럼 이어지는 동적인 과정을 배웠다. 물이 증발해서 수증기가 되고 구름이 되었다가 땅에 비가 내리는 과정, 바다가 침식을 일으켜 해안선이 변하고 육지가 깎여 나가는 과정, 공룡이 멸종하고 코로나19 바이러스가 등장하여 퍼지는 생물의 다양성이 증가하는 과정 등 우리는 창조세계를 현대인의 관점에서 동적인 과정으로 이해한다.
하지만 고대 근동인들은 창조의 과정을 즉각적이고 완성된 형태로 만드는 과정으로 주로 이해했다. 그래서 하나님의 창조를 기술한 창세기 1장을 읽어보면 창조주가 무언가를 만들 때 즉각적으로 피조물이 만들어지고 그 피조물은 완성된 형태로 새로움을 드러낸다. 물론 창세기 1장 11절에는 땅이 풀과 채소와 나무를 내라고 명령하는 표현도 있다. 이 표현은 어떤 시간적 과정을 거쳐서 땅에서 식물이 자라나는 과정을 묘사한다고 이해할 수 있으며 고대 근동인들이 동적이고 시간적 과정을 전혀 몰랐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들은 창조주 하나님이 한 번에 완성된 모습으로 피조물들을 창조했다고 이해했다. 창세기 1장에 나오는 6일의 창조 주간은 그렇게 즉각적이고 완성된 모습으로 창조하는 과정을 기록한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고대 히브리들이 이해한 방식으로 만물을 창조했을까? 하나님이 만물의 창조주이심을 성경은 명확히 선언한다. 하지만 하나님이 우주를 창조하는 과정과 방식을 고대 근동인들의 이해했던 그 한계 안에 가두어 두는 오류는 극복해야 한다. 성경은 문자적으로 즉각적이고 완성된 형태로 창조하는 과정을 묘사하지만 그것은 신인동형적 표현일 뿐만 아니라 고대 근동인들이 가졌던 제한된 개념과 어휘와 언어로 표현된 어린아이의 그림과 같다. 부모의 사랑을 받고 자라나는 아이가 부모의 모습을 그린 그림이 거짓이 아니듯, 고대 히브리인의 제한된 언어에 담겨 신인동형적으로 묘사된 창조 기사는 진리를 담고 있다. 하지만 어린아이의 그림으로 부모의 참모습을 제한해서는 안 되듯이, 전능한 창조주의 모습을 끌어내려 고대인들의 언어와 개념에 가두어서는 안 된다.
@logos bible software
출애굽 이후 모세가 시내산으로 십계명을 받으러 올라 간 지 40일이 지났지만 아무 소식이 없었다. 시내산 아래서 기다리던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를 기다리다가 결국 금붙이를 모아서 금송아지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 금송아지를 향해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낸 신’이라고 부르며 경배했다. 보이지 않던 하나님, 불과 구름 기둥으로 임하던 하나님, 그리고 그 하나님을 대리하던 모세가 행방불명 되었을 때 기다림에 지친 그들은 스스로 신을 만들어 낼 수밖에 없었다. 보이지 않고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 우리의 언어로 묘사되지 않는 하나님, 우리의 지성으로 파악되지 않는 하나님은 종종 우리를 두려움에 쌓이게 한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생각대로 우리의 언어로 우리의 입맛에 맞게 하나님은 이런 분이라고 규정하고 제한하고 그렇게 엉뚱한 하나님의 형상을 만들어 내는지도 모른다. 이스라엘 백성이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낸 신이라고 불렀던 그 금송아지처럼 우리는 끝없이 신의 형상을 만들어낸다. 성경은 하나님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인간을 창조했다고 증언하지만, 반대로 우리는 우리의 모습대로 하나님을 만들어낸다. 그것이 바로 우상숭배다.
현대 과학으로 이해한 창조는 어떨까? 고대 근동인들의 즉각적이고 완성된 창조의 개념과 달리 우리는 우주의 빅 히스토리를 통해 100억 년이 넘는 긴 시간적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이 창조세계에 부여한 자연법칙을 섭리하고 역사하심으로 우주와 지구와 인간을 창조하셨다고 이해한다. 그러나 주의할 점은 우리가 지금 갖고 있는 창조주 하나님의 모습도 여전히 신인동형적이고 우리 시대의 언어와 개념과 지성의 한계 안에서 표현되고 이해되는 하나님의 모습이라는 점이다. 과학은 인간이 자연세계를 이해하는 과정이며 과학은 완성된 것이 아니라 점진적으로 실재에 근사하는 과정이다. 그 과학을 통해 하나님의 창조를 이해하려는 현대 그리스도인들의 노력도 결국 오늘날 우리의 지성과 인지의 한계를 넘을 수는 없다. 비록 수천 년 전 고대 근동인들의 지성과 인지보다는 훨씬 고급스럽고 깊이가 있다고 해도 여전히 우리가 이해하는 하나님의 창조는 한계를 갖는다.
하나님을 창조주로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결국 우리가 창조주를 이해하는 방식은 신인동형적이고 우리 시대의 한계에 제한된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은 성경에 기록된 제한된 문자와 언어를 넘어 그리고 우리 인간의 지성을 넘어 그리고 현대 과학의 놀라운 성과로도 다 담을 수 없는 위대한 창조주임을 기억하고 고백하고 신앙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