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신Q] 10. 과학이 신앙을 무너뜨리지 않나요?
과학은 위험하다?
과학은 위험하다고 주장하는 분들을 종종 만납니다. 과학이 신앙을 파괴하거나 대체하거나 혹은 회피하게 만든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많습니다. 특히, 현대과학의 내용이 창세기 1장과 모순된다고 오해하는 분들은 과학이 성경을 부정하거나 성경의 권위를 무너뜨린다며 기독교의 적으로 간주합니다. 과연 과학은 신앙을 무너뜨리는 위험한 것일까요?
성경은 과학 교과서가 아닙니다. 창세기 1장은 고대근동 지역 사람들이 그들의 세계관과 상식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그 눈높이에 맞춰 기록된 본문입니다. 그래서 현대과학과 비교하는 일 자체가 엉뚱한 접근입니다. 그 내용은 이미 다섯 살짜리 아이와 엄마의 대화를 비유로 삼아 다룬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 해석의 오해를 넘어서도 여전히 과학 그 자체가 갖는 위험성에 주목하는 분들에게는 어떤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요?
흔히 언급되는 과학의 위험성은 과학이 하나님을 대신하여 우상이 된다는 점과, 과학이 신앙을 무너뜨리는 역할을 한다는 점입니다. 동의하는 면도 있지만 이런 입장은 과학을 너무 과대평가한 듯합니다. 과학은 경배의 대상이 아니라 하나의 도구일 뿐입니다. 과학 그 자체가 어떤 가치를 지향하며 경배할 대상을 만들어 낸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과학이 신의 자리를 대신할 수는 없는 법입니다. 물론 과학에 심취한 사람들이 과학 이외의 영역을 인정하지 않으면서 과학주의를 내세우기도 하고 과학을 무신론의 기반으로 삼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과학이 곧 무신론을 의미하거나 과학이 또 하나의 신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과학은 자연에 대한 설명 체계를 말하기도 하지만 사고하는 방식, 진리에 대한 태도, 탐구하는 자세를 지칭하기도 합니다. 물론 하나의 도구로서 과학은 오용될 위험이 있습니다.
사실 모든 도구가 다 위험할 수 있습니다. 칼은 요리에 사용되는 훌륭한 도구이지만 살인에 사용되기도 합니다. 심지어 기독교의 이름으로 조직된 십자군도 폭력과 살인을 자행한 전쟁 범죄에 사용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과학도 잘못 사용하면 신앙을 파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제대로 잘 사용하면 과학은 신앙에 커다란 유익을 줍니다. 결국, 과학이라는 도구를 사용하는 우리가 어떤 결정을 내리고 어떻게 활용하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과학, 창조세계를 조명해주는 유익한 도구
과학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놀라운 축복의 도구입니다. 합리성을 근거로 하는 과학은 논리적이고 증거에 기반하며, 인간과 창조세계를 이해하는 길로 인도합니다. 어떤 분들은 이런 합리성이 신앙과는 대치되고 오히려 신앙을 무너뜨리는 역할을 한다고 주장합니다. 합리성은 분명 신앙과는 다른 결을 갖습니다. 그러나 합리성은 창조주 하나님의 속성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과학을 도구로 사용하는 인간의 이성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축복입니다. 우리가 과학의 도구를 통해 창조세계를 이해할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성품을 반영하여 창조세계를 질서 있게 합리적인 세계로 창조하셨기 때문이며, 우리 인간에게 하나님의 형상을 나누어 주셔서 창조세계를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의 두 가지 전통은 ‘예루살렘’과 ‘아테네’로 종종 묘사됩니다. 예루살렘은 신앙을 대변합니다. 여기서 신앙은 맹목적인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말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믿음은 언제나 하나님을 신뢰하고 따르는 일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이와 달리, 아테네는 이성을 대변합니다. 사도 바울의 복음을 들은 베뢰아 교회 성도들처럼 과연 그런가 묻고 생각하는 전통입니다. 과학은 아테네의 전통에 서 있습니다. 철학과 신학을 비롯한 인간의 지성사에 담긴 많은 지적 노력이 아테네의 전통을 따르지만, 특히 현대과학은 경험적 증거에 바탕을 둔 실증적인 면이 강조되며 놀라운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아테네 전통의 정점에 과학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과학은 신앙을 무너뜨리기보다는 신앙과 상호작용합니다. 하나님은 신뢰의 대상이지만 지적으로 파악하고 이해해야 할 대상이기도 합니다. 창조세계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작품이라는 신앙고백을 요구하지만, 동시에 인과관계와 자연법칙과 그 역사를 파악해 낼 지적인 작업, 즉 과학을 요구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했다는 믿음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며 어떻게 천지를 창조하셨고 어떻게 지금도 온 우주를 섭리하시는지 파악하고 이해하려는 이성적 작업과 대립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창조주로 고백하는 신앙에서 출발한 우리는 그 창조세계가 어떻게 운행되는지 궁금해하고 그래서 묻게 됩니다. 신앙은 이성의 길을 열어주는 출발점입니다. 적어도 그리스도인에게는 그렇습니다. 과학은 이성의 길을 헤쳐나가 신과 인간과 창조세계를 조명해 주는 유익한 도구로 작동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신앙으로 하나님을 따르고, 이성으로 그리고 과학으로 하나님의 세계를 배워갑니다.
‘마술사’ ‘시계공’ 같은 신?
과학이 신앙을 무너뜨린다는 주장은 사실 그 신앙의 대상이 누구인가에 따라 맞는 말이 될 수도 있고 틀린 주장이 될 수도 있습니다. 가령, 신앙의 대상이 마술사 같은 신이라면 어떨까요? 그 어떤 합리성도 없이 무작위적이며 제멋대로인 신이라면 어떻겠습니까? 아무 때나 마구잡이로 무슨 일이든 행하는 마술사 같은 신이라면 그의 창조세계에서 그 어떤 규칙성이나 법칙도 기대할 수 없습니다. 마치 인형극 같습니다. 인형들의 손동작과 발동작과 눈동작을 비롯한 모든 행동이 조작하는 사람에 의해 통제되고 구현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만일 신이 인형극을 하고 있다면, 자율성이 배제된 창조세계에서 합리성이나 규칙을 기대할 수 없으며 과학도 작동할 수 없습니다. 만일 그런 신을 믿는 신앙이라면, 성공적으로 창조세계에서 규칙과 인과관계를 찾고 어느 정도 미래도 예측할 수 있는 과학은 당연히 그 신앙을 무너뜨릴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믿는 신은 과연 인형극의 신인가요?
반대로 우리가 믿는 신이 시계공 같다면 어떨까요? 신이 창조한 세계가 한 틈의 오차도 없는 시계처럼 정교하게 움직이고 모든 것이 결정되어 있다면 어떨까요? 만일 과학이 파악한 창조세계가 시계와 같다면 과연 신의 자리는 어디냐는 물음이 제기됩니다. 초침과 분침과 시침이 정확하게 규칙에 따라 움직이는 결정된 세계에서 신의 역할은 필요 없어 보이기 때문입니다. 신은 단지 처음에 시계를 만드는 일을 했을 뿐 그 이후에는 모든 것을 방임하고 시계는 스스로 작동합니다. 가끔 시계가 고장 나면 수리하러 창조세계로 내려올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수리가 필요한 시계라면 애초부터 제대로 만들지 못한 것이라는 지적도 제기됩니다. 그러니 신은 시계공의 도움이 필요 없는 시계처럼 완벽하게 자율성을 가진 자연세계를 창조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바로 이신론(deism)의 신입니다. 하지만 창조세계는 시계처럼 작동될까요? 우리가 믿는 신은 과연 시계공 같은 신인가요?
우리가 성서를 통해 믿는 하나님은 변덕스럽거나 무작위적으로 일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성서가 증언하듯이 그분은 동일하시고 약속을 지키시며 신실하십니다. 창조세계에 부여한 자연법칙을 마구 깨트리고 혼란스럽게 만드는 분이 아닙니다. 창세기 1장이 증언하듯이 그분은 혼돈에서 질서를 창조하셨습니다. 또한 자연세계가 시계처럼 스스로 작동하도록 창조한 후에 아무 일도 하지 않는 분이 아닙니다. 창조세계를 방임하는 신은 우리가 믿고 따르는 하나님과 거리가 멉니다.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셨을 뿐 아니라 창조된 세계를 보존하시는 분으로 이해합니다.
자연세계의 자율성은 근대과학이 탄생한 후에 논쟁이 되어 왔습니다. 가령, 시계는 스스로 움직일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배터리가 필요합니다. 아무리 정교한 시계라고 해도 배터리가 수명을 다하면 정지합니다. 하나님은 창조세계가 시계처럼 정지하거나 혹은 초침, 분침, 시침이 제멋대로 움직이는 무질서한 상태가 되지 않도록 끊임없이 일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이 없다면 자연법칙도 성립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자연법칙을 통해 질서를 창조한 이후에도 끊임없이 무질서로 회귀하려는 자연세계를 지금도 붙들고 섭리하고 운행합니다. 무로부터의 창조라는 말은 무질서에서 질서로 창조하셨을 뿐 아니라 자연세계가 무질서로 돌아가지 않도록 계속 창조하고 계신다는 계속적 창조(creatio continua)의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과학, 하나님을 믿고 창조세계를 이해하는 축복의 도구
과학이 신앙을 무너뜨린다는 주장은 인형극의 신을 믿거나 시계공 같은 신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적절히 적용되는 말입니다. 인형극의 신을 믿는 신앙은 과학에 의해 무너집니다. 하지만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인형극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반대로 과학은 기독교 신앙을 무너뜨리고 이신론을 주입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과학으로 자세히 탐구해보면 자연세계는 시계처럼 기술될 수 없습니다. 창조세계는 시계처럼 기계적이고 빈틈이 없고 모든 것이 결정된 세계가 아니라, 수많은 우발성과 미지의 영역을 담고 있는 역동적인 세계입니다. 과학이 그려내는 자연세계는 사진처럼 정교하지 않으며 아직 스케치도 못한 영역들이 넘쳐납니다. 과학이 발전하면 미지의 영역이 결국 다 밝혀질 것이라는 주장도 과학의 발전과 더불어 미지의 영역이 늘어난다는 사실을 기억하면 허망한 주장임을 깨닫게 됩니다.
결국, 창조세계는 인형극도 아니고 시계도 아닙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인형극의 신이거나 시계공 같은 신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오해하지만 않는다면 과학은 창조주에 대한 신앙을 무너뜨릴 수는 없습니다. 과학은 산신령이나 용왕 같은 미신을 깨트려 주었습니다. 하나님을 마술사처럼 오해하는 주술적 신앙도 극복하게 도와줍니다. 그러나 과학은 우리를 시계공 같은 신으로 인도하지 않습니다. 그런 위험성이 충분하지만 지적 성실성을 가지고 자연세계를 탐구하고 과학이 답하지 못한 영역에 대해 겸손함을 갖는다면 자연세계를 단순한 시계로 기술할 수 없음을 인정하게 됩니다. 우리는 신앙으로 하나님을 신뢰하고 따르며 이성으로 하나님과 창조세계를 이해하려고 합니다. 과학은 그 과정에서 매우 유용하게 사용되는 축복의 도구입니다.
글 | 우종학
과학과 신학의 대화 대표, 서울대학교 물리천문학부 교수
■ 더 읽기
우종학 | 무신론 기자, 크리스천 과학자에게 따지다 | IVP
이 책은 과학과 신앙의 관계에 대해 자세히 설명한다. 중립적인 과학에 대해 꼭 짚고 넘어갈 점(3장)부터 과학을 숭배하는 무신론자들(4장), 과학과 신앙의 관계에 대한 세 가지 견해(6장)까지 다룬다.
출처 : 복음과상황(http://www.goscon.co.kr)
[과신Q] 10. 과학이 신앙을 무너뜨리지 않나요?
과학은 위험하다?
과학은 위험하다고 주장하는 분들을 종종 만납니다. 과학이 신앙을 파괴하거나 대체하거나 혹은 회피하게 만든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많습니다. 특히, 현대과학의 내용이 창세기 1장과 모순된다고 오해하는 분들은 과학이 성경을 부정하거나 성경의 권위를 무너뜨린다며 기독교의 적으로 간주합니다. 과연 과학은 신앙을 무너뜨리는 위험한 것일까요?
성경은 과학 교과서가 아닙니다. 창세기 1장은 고대근동 지역 사람들이 그들의 세계관과 상식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그 눈높이에 맞춰 기록된 본문입니다. 그래서 현대과학과 비교하는 일 자체가 엉뚱한 접근입니다. 그 내용은 이미 다섯 살짜리 아이와 엄마의 대화를 비유로 삼아 다룬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 해석의 오해를 넘어서도 여전히 과학 그 자체가 갖는 위험성에 주목하는 분들에게는 어떤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요?
흔히 언급되는 과학의 위험성은 과학이 하나님을 대신하여 우상이 된다는 점과, 과학이 신앙을 무너뜨리는 역할을 한다는 점입니다. 동의하는 면도 있지만 이런 입장은 과학을 너무 과대평가한 듯합니다. 과학은 경배의 대상이 아니라 하나의 도구일 뿐입니다. 과학 그 자체가 어떤 가치를 지향하며 경배할 대상을 만들어 낸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과학이 신의 자리를 대신할 수는 없는 법입니다. 물론 과학에 심취한 사람들이 과학 이외의 영역을 인정하지 않으면서 과학주의를 내세우기도 하고 과학을 무신론의 기반으로 삼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과학이 곧 무신론을 의미하거나 과학이 또 하나의 신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과학은 자연에 대한 설명 체계를 말하기도 하지만 사고하는 방식, 진리에 대한 태도, 탐구하는 자세를 지칭하기도 합니다. 물론 하나의 도구로서 과학은 오용될 위험이 있습니다.
사실 모든 도구가 다 위험할 수 있습니다. 칼은 요리에 사용되는 훌륭한 도구이지만 살인에 사용되기도 합니다. 심지어 기독교의 이름으로 조직된 십자군도 폭력과 살인을 자행한 전쟁 범죄에 사용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과학도 잘못 사용하면 신앙을 파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제대로 잘 사용하면 과학은 신앙에 커다란 유익을 줍니다. 결국, 과학이라는 도구를 사용하는 우리가 어떤 결정을 내리고 어떻게 활용하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과학, 창조세계를 조명해주는 유익한 도구
과학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놀라운 축복의 도구입니다. 합리성을 근거로 하는 과학은 논리적이고 증거에 기반하며, 인간과 창조세계를 이해하는 길로 인도합니다. 어떤 분들은 이런 합리성이 신앙과는 대치되고 오히려 신앙을 무너뜨리는 역할을 한다고 주장합니다. 합리성은 분명 신앙과는 다른 결을 갖습니다. 그러나 합리성은 창조주 하나님의 속성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과학을 도구로 사용하는 인간의 이성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축복입니다. 우리가 과학의 도구를 통해 창조세계를 이해할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성품을 반영하여 창조세계를 질서 있게 합리적인 세계로 창조하셨기 때문이며, 우리 인간에게 하나님의 형상을 나누어 주셔서 창조세계를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의 두 가지 전통은 ‘예루살렘’과 ‘아테네’로 종종 묘사됩니다. 예루살렘은 신앙을 대변합니다. 여기서 신앙은 맹목적인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말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믿음은 언제나 하나님을 신뢰하고 따르는 일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이와 달리, 아테네는 이성을 대변합니다. 사도 바울의 복음을 들은 베뢰아 교회 성도들처럼 과연 그런가 묻고 생각하는 전통입니다. 과학은 아테네의 전통에 서 있습니다. 철학과 신학을 비롯한 인간의 지성사에 담긴 많은 지적 노력이 아테네의 전통을 따르지만, 특히 현대과학은 경험적 증거에 바탕을 둔 실증적인 면이 강조되며 놀라운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아테네 전통의 정점에 과학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과학은 신앙을 무너뜨리기보다는 신앙과 상호작용합니다. 하나님은 신뢰의 대상이지만 지적으로 파악하고 이해해야 할 대상이기도 합니다. 창조세계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작품이라는 신앙고백을 요구하지만, 동시에 인과관계와 자연법칙과 그 역사를 파악해 낼 지적인 작업, 즉 과학을 요구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했다는 믿음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며 어떻게 천지를 창조하셨고 어떻게 지금도 온 우주를 섭리하시는지 파악하고 이해하려는 이성적 작업과 대립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창조주로 고백하는 신앙에서 출발한 우리는 그 창조세계가 어떻게 운행되는지 궁금해하고 그래서 묻게 됩니다. 신앙은 이성의 길을 열어주는 출발점입니다. 적어도 그리스도인에게는 그렇습니다. 과학은 이성의 길을 헤쳐나가 신과 인간과 창조세계를 조명해 주는 유익한 도구로 작동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신앙으로 하나님을 따르고, 이성으로 그리고 과학으로 하나님의 세계를 배워갑니다.
‘마술사’ ‘시계공’ 같은 신?
과학이 신앙을 무너뜨린다는 주장은 사실 그 신앙의 대상이 누구인가에 따라 맞는 말이 될 수도 있고 틀린 주장이 될 수도 있습니다. 가령, 신앙의 대상이 마술사 같은 신이라면 어떨까요? 그 어떤 합리성도 없이 무작위적이며 제멋대로인 신이라면 어떻겠습니까? 아무 때나 마구잡이로 무슨 일이든 행하는 마술사 같은 신이라면 그의 창조세계에서 그 어떤 규칙성이나 법칙도 기대할 수 없습니다. 마치 인형극 같습니다. 인형들의 손동작과 발동작과 눈동작을 비롯한 모든 행동이 조작하는 사람에 의해 통제되고 구현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만일 신이 인형극을 하고 있다면, 자율성이 배제된 창조세계에서 합리성이나 규칙을 기대할 수 없으며 과학도 작동할 수 없습니다. 만일 그런 신을 믿는 신앙이라면, 성공적으로 창조세계에서 규칙과 인과관계를 찾고 어느 정도 미래도 예측할 수 있는 과학은 당연히 그 신앙을 무너뜨릴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믿는 신은 과연 인형극의 신인가요?
반대로 우리가 믿는 신이 시계공 같다면 어떨까요? 신이 창조한 세계가 한 틈의 오차도 없는 시계처럼 정교하게 움직이고 모든 것이 결정되어 있다면 어떨까요? 만일 과학이 파악한 창조세계가 시계와 같다면 과연 신의 자리는 어디냐는 물음이 제기됩니다. 초침과 분침과 시침이 정확하게 규칙에 따라 움직이는 결정된 세계에서 신의 역할은 필요 없어 보이기 때문입니다. 신은 단지 처음에 시계를 만드는 일을 했을 뿐 그 이후에는 모든 것을 방임하고 시계는 스스로 작동합니다. 가끔 시계가 고장 나면 수리하러 창조세계로 내려올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수리가 필요한 시계라면 애초부터 제대로 만들지 못한 것이라는 지적도 제기됩니다. 그러니 신은 시계공의 도움이 필요 없는 시계처럼 완벽하게 자율성을 가진 자연세계를 창조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바로 이신론(deism)의 신입니다. 하지만 창조세계는 시계처럼 작동될까요? 우리가 믿는 신은 과연 시계공 같은 신인가요?
우리가 성서를 통해 믿는 하나님은 변덕스럽거나 무작위적으로 일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성서가 증언하듯이 그분은 동일하시고 약속을 지키시며 신실하십니다. 창조세계에 부여한 자연법칙을 마구 깨트리고 혼란스럽게 만드는 분이 아닙니다. 창세기 1장이 증언하듯이 그분은 혼돈에서 질서를 창조하셨습니다. 또한 자연세계가 시계처럼 스스로 작동하도록 창조한 후에 아무 일도 하지 않는 분이 아닙니다. 창조세계를 방임하는 신은 우리가 믿고 따르는 하나님과 거리가 멉니다.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셨을 뿐 아니라 창조된 세계를 보존하시는 분으로 이해합니다.
자연세계의 자율성은 근대과학이 탄생한 후에 논쟁이 되어 왔습니다. 가령, 시계는 스스로 움직일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배터리가 필요합니다. 아무리 정교한 시계라고 해도 배터리가 수명을 다하면 정지합니다. 하나님은 창조세계가 시계처럼 정지하거나 혹은 초침, 분침, 시침이 제멋대로 움직이는 무질서한 상태가 되지 않도록 끊임없이 일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이 없다면 자연법칙도 성립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자연법칙을 통해 질서를 창조한 이후에도 끊임없이 무질서로 회귀하려는 자연세계를 지금도 붙들고 섭리하고 운행합니다. 무로부터의 창조라는 말은 무질서에서 질서로 창조하셨을 뿐 아니라 자연세계가 무질서로 돌아가지 않도록 계속 창조하고 계신다는 계속적 창조(creatio continua)의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과학, 하나님을 믿고 창조세계를 이해하는 축복의 도구
과학이 신앙을 무너뜨린다는 주장은 인형극의 신을 믿거나 시계공 같은 신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적절히 적용되는 말입니다. 인형극의 신을 믿는 신앙은 과학에 의해 무너집니다. 하지만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인형극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반대로 과학은 기독교 신앙을 무너뜨리고 이신론을 주입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과학으로 자세히 탐구해보면 자연세계는 시계처럼 기술될 수 없습니다. 창조세계는 시계처럼 기계적이고 빈틈이 없고 모든 것이 결정된 세계가 아니라, 수많은 우발성과 미지의 영역을 담고 있는 역동적인 세계입니다. 과학이 그려내는 자연세계는 사진처럼 정교하지 않으며 아직 스케치도 못한 영역들이 넘쳐납니다. 과학이 발전하면 미지의 영역이 결국 다 밝혀질 것이라는 주장도 과학의 발전과 더불어 미지의 영역이 늘어난다는 사실을 기억하면 허망한 주장임을 깨닫게 됩니다.
결국, 창조세계는 인형극도 아니고 시계도 아닙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인형극의 신이거나 시계공 같은 신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오해하지만 않는다면 과학은 창조주에 대한 신앙을 무너뜨릴 수는 없습니다. 과학은 산신령이나 용왕 같은 미신을 깨트려 주었습니다. 하나님을 마술사처럼 오해하는 주술적 신앙도 극복하게 도와줍니다. 그러나 과학은 우리를 시계공 같은 신으로 인도하지 않습니다. 그런 위험성이 충분하지만 지적 성실성을 가지고 자연세계를 탐구하고 과학이 답하지 못한 영역에 대해 겸손함을 갖는다면 자연세계를 단순한 시계로 기술할 수 없음을 인정하게 됩니다. 우리는 신앙으로 하나님을 신뢰하고 따르며 이성으로 하나님과 창조세계를 이해하려고 합니다. 과학은 그 과정에서 매우 유용하게 사용되는 축복의 도구입니다.
글 | 우종학
과학과 신학의 대화 대표, 서울대학교 물리천문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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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종학 | 무신론 기자, 크리스천 과학자에게 따지다 | IVP
이 책은 과학과 신앙의 관계에 대해 자세히 설명한다. 중립적인 과학에 대해 꼭 짚고 넘어갈 점(3장)부터 과학을 숭배하는 무신론자들(4장), 과학과 신앙의 관계에 대한 세 가지 견해(6장)까지 다룬다.
출처 : 복음과상황(http://www.gosco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