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에 다가서기
6. 우연을 통해 섭리하는 하나님
글ㅣ우종학
서울대학교 교수
과학과신학의대화 대표
과학의 발전 과정을 통해 그리스도인들은 조금씩 더 실재에 가깝게 창조세계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과학시대 이전의 그리스도인들은 편평한 지구, 천동설의 지구, 6000년 역사의 지구와 우주, 그리고 불변하는 생물의 종 등의 특징으로 창조세계를 이해했으며 이 그림은 사실 성서가 기록되던 고대 근동의 세계관에 기초를 두고 있다. 하지만 창조주 하나님이 편평하고 고정된 지구와 불변하는 생물의 종을 약 6000년 전에 창조했다고 주장한다면 창조주를 고대 근동의 세계관에 가두는 셈이다. 과학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은 고대 근동의 제한된 세계관을 넘어서 우리에게 일반계시로 주신 자연이라는 책, 즉 우주와 지구와 생명의 세계를 과학이라는 도구를 통해 바르게 읽어 내어야 한다.
그런데 과학을 통해 창조세계를 이해하는 관점이 바뀌면서 그 창조세계를 섭리하고 다스리는 하나님에 대한 이해도 급격히 변해왔다. 가령, 고대 근동의 세계관은 단번에 완성된 형태로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즉각적 창조의 개념을 담고 있지만, 현대과학은 매우 긴 시간을 통해 동적인 과정으로 우주/지구/생명이 창조되었음을 알려준다. 초자연적이고 즉각적인 창조의 방식이 아니라, 자연법칙을 사용한 동적이고 긴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이 창조세계를 창조하고 섭리하신다는 의미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부분에서 어려움을 느낀다. 즉 창조주가 어떻게 창조하고 역사하는지, 창조주의 행위에 관해서도 새로운 이해가 요구되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 가장 큰 어려움과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점이 바로 우연성이다. 우주가 우연한 과정을 통해 진화했고 생명의 세계가 우연한 과정을 통해 다양한 종들을 만들어 내었다면, 이러한 자연세계는 하나님의 창조를 부정하는 것일까?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는 과학의 우연성과 반대되는 개념이며, 그렇기 때문에 과학이 자연현상을 우연으로 설명해 내면 그것은 하나님의 창조와는 양립할 수 없다고 오해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많다. 가령, 창조과학자들은 우연성을 담고 있는 과학, 특히 생물진화과학을 반대한다. 인간의 기원을 우연의 과정으로 설명하고 우주와 생명의 역사를 우연성으로 설명하는 과학은 무신론이며 그런 과학을 수용하는 그리스도인들은 무신론자보다 더 나쁘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런 오해와 잘못된 주장은 과학과 신학이 서로 다른 범주에 속한다는 점을 이해하지 못하고 과학과 신학을 같은 위상에서 비교하기 때문에 생기는 안타까운 결과이다. 특히 과학의 설명 방식에 대한 오해에서 이런 주장들이 출발한다.

@AlexAntropov86, pixabay
우연성이란 무엇일까? 일상적인 의미의 우연은 뭔가 계획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도하지 않은 사건이 발생할 때 사용한다. 미리 계획하지 않았지만 지하철에서 친구를 맞닥뜨리면 우리는 우연이라고 표현한다. 하지만 이런 일상적 의미와 달리 과학에서 사용하는 우연성은 어떤 목적이나 계획을 아예 취급하지 않는다. 과학은 형이상학적인 목적과 의도 혹은 방향을 다루지 않기 때문이다. 소위 자연주의적 방법론이라고 부르는 과학의 방법론은 자연현상의 인과관계를 자연세계 내부의 원인과 결과로 설명할 뿐이며 그 자연현상 뒤에 신의 의도나 계획이 있는지 혹은 신이 존재하지 않으며 목적과 방향성 없이 그런 현상이 일어났는지를 다루지 못한다. 목적과 방향, 의도 이런 설명은 과학의 범주가 아니라 형이상학, 철학 혹은 신학의 범주이기 때문이다.
물론 무신론을 주장하는 일부 과학자들은 자연현상을 과학으로 설명할 수 있다면 신이 배제’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과학은 자연현상을 다룰 뿐, 어떤 신적 존재나 지적인 존재가 의도와 목적을 가지고 자연현상을 섭리하고 역사하는지 혹은 그렇지 않은 지 변별할 수 없다. 무신론자인 자크 모노와 리처드 도킨스는 생물의 진화과정을 우연성으로 설명하면서 자연세계에 목적성이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만일 신이 창조했다면 그 신은 눈먼 시계공과 같았을 거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들의 주장은 신의 섭리와 역사를 자연현상의 한 원인처럼 끌어내린 범주의 오류다. 과학과 과학주의 혹은 무신론을 구별해야 한다.
과학은 목적과 의도를 다루지 않는 대신 모든 현상을 필연과 우연으로 설명한다. 가령, 주사위를 던져서 3이 나오면 이 현상은 필연일까, 우연일까? 필연은 아니다. 왜냐하면 다른 숫자가 나올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러 가능성 중에 한가지 가능성이 실현되면 과학은 우연이라고 설명한다. 가령, 전자가 왼쪽으로 갈 수도 있고 오른쪽으로 갈 수도 있는데, 실험을 해보니 왼쪽으로 갔다면 과학은 우연이라고 말한다. 과학적 설명은 필연과 우연 밖에 없다. 그리고 그 필연과 우연은 신학에서 말하는 신의 목적과 의도, 혹은 섭리와 반대되는 개념이 아니다. 과학적 설명으로는 우연이지만, 신학적 설명으로는 하나님의 계획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가령, 성서에는 이런 사건들이 많이 등장한다. 사도행전에는 가룟 유다를 대신할 제자를 뽑을 때 제비뽑기를 사용하는 장면이 나온다. 다시스로 도망가는 배에 폭풍이 일자, 선원들은 제비뽑기를 통해 요나가 그 원인임을 알아낸다. 이런 사건들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제비뽑기로 한 사람이 선정되면 과학은 우연이라고 설명한다. 반드시 그 사람이 뽑혀야 하는 필연이 아니기 때문에 우연이다. 하지만 과학적으로 우연인 사건을 통해 하나님은 정확히 자신의 뜻을 보여주시고 하나님의 계획을 드러내신다. 잠언 16장 33절은 이렇게 말한다. “제비는 사람이 뽑으나 모든 일을 작정하기는 여호와께 있느니라.”
룻과 보아스의 만남도 흥미롭다. 룻은 보아스를 만나서 부부가 되고 결국 보아스는 룻의 기업을 무르게 된다. 그런데 룻기 2장 3절은 이렇게 증언한다. “룻이 가서 베는 자를 따라 밭에서 이삭을 줍는데 우연히 엘리멜렉의 친족 보아스에게 속한 밭에 이르렀더라” 룻이 보아스를 만나게 된 것은 우연일까? 아니면 하나님의 섭리일까? 과학적 설명은 우연이다. 성서도 그렇게 증언한다. 룻은 ‘우연히’ 보아스의 밭에서 이삭을 줍게 되었다고. 하지만 신학적 설명은 하나님의 계획이다. 우리는 그 우연한 이삭줍기 과정을 통해서 룻이 보아스를 만나도록 하나님이 의도하시고 계획하셨다고 믿는다.

@spalla67, pixabay
우주와 생물의 진화는 어떨까? 마찬가지다. 생물의 진화는 다양한 가능성을 가진 우연의 과정이다. DNA의 변이는 한 방향으로 미리 결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무작위적으로 발생한다. 다양한 생물들이 현재의 모습으로 진화한 과정을 과학은 우연으로 설명한다. 하지만 이 설명은 신의 계획과 섭리가 있었는지 혹은 없었는지를 묻는 말에 대한 답이 아니다. 과학은 생물들이 다른 방식으로 진화했을 가능성이 있었다고 말할 뿐이다. 그것이 과학이 말하는 우연의 의미다. 하지만 신학적으로는 왜 그 우연이 발생했는지 묻는다면 어떨까? 여러 가지 가능성 중에 왜 그 가능성이 실현되었을지 묻는 물음에 과학은 답할 수 없다. 과학은 그저 필연이 아니라고만 말할 뿐이다. 하지만 신학은 그 우연이 바로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이라고 설명한다. ‘왜 하필 룻이 보아스의 밭에 갔을까’라고 물으면 과학은 우연이라고 설명하지만, 신학은 그 우연을 하나님이 사용하셨다고 설명한다. 과학의 우연성은 하나님의 섭리와 배치되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이 실현되는 과정이다.
무신론자들과 다르게 신학자들은 자연세계에 담긴 우연성이 오히려 신의 목적과 의도를 담은 것이라고 말한다. 독일의 조직신학자 판넨베르크는 창조의 과정을 기계적으로 제한하는 그런 신관을 깨트리는데 우연성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지적한다. 우연이 없는 필연적 과정 만을 다루는 기계론적 자연관은 하나님을 기껏해야 이신론의 신으로밖에 만들지 못한다. 이신론의 신은 과거에 자연질서를 창조했지만, 그 이후에는 아무 역할도 못하고 안드로메다로 휴가를 떠나 있는 셈이다. 자연의 역사 과정에서 계속 창조하는 신이 아니라 그저 만들어 놓고 아무런 일도 하지 않는 신의 부재가 바로 이신론의 기계론적 창조관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기계론적인 자연관과 더불어 이신론적인 신관을 깨트리는 역할을 바로 우연성이 해주었다는 것이 판넨베르크의 관점이다. 그래서 그는 진화생물학에 반대하는 반-진화론이 신학과 과학의 관계에서 일어난 가장 심각한 오류라고 지적한다.
미국의 과학신학자인 아서 피콕은 우연은 모든 가능한 탐색 대상들을 훑고 지나가는 신의 레이더 탐지기라고 표현했다. 우연성은 새로움을 만들어내는 엔진이며 다양성과 생명력을 제공한다. 그래서 기계적이고 새로운 가능성이 없는 창조세계가 아니라, 놀랍고 풍성한 새로움을 만들어내는 창조세계로 만든다. 창조세계는 과학으로는 우연이라고밖에 설명할 수 없지만 신학으로는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와 역사를 통해 하나님의 계획이 실현되는 영광스런 세계다. 우연을 통해 섭리하시는 창조주 하나님께 우리는 마땅히 찬양과 경배를 돌려 드려야 한다.
과학에 다가서기
6. 우연을 통해 섭리하는 하나님
글ㅣ우종학
서울대학교 교수
과학과신학의대화 대표
과학의 발전 과정을 통해 그리스도인들은 조금씩 더 실재에 가깝게 창조세계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과학시대 이전의 그리스도인들은 편평한 지구, 천동설의 지구, 6000년 역사의 지구와 우주, 그리고 불변하는 생물의 종 등의 특징으로 창조세계를 이해했으며 이 그림은 사실 성서가 기록되던 고대 근동의 세계관에 기초를 두고 있다. 하지만 창조주 하나님이 편평하고 고정된 지구와 불변하는 생물의 종을 약 6000년 전에 창조했다고 주장한다면 창조주를 고대 근동의 세계관에 가두는 셈이다. 과학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은 고대 근동의 제한된 세계관을 넘어서 우리에게 일반계시로 주신 자연이라는 책, 즉 우주와 지구와 생명의 세계를 과학이라는 도구를 통해 바르게 읽어 내어야 한다.
그런데 과학을 통해 창조세계를 이해하는 관점이 바뀌면서 그 창조세계를 섭리하고 다스리는 하나님에 대한 이해도 급격히 변해왔다. 가령, 고대 근동의 세계관은 단번에 완성된 형태로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즉각적 창조의 개념을 담고 있지만, 현대과학은 매우 긴 시간을 통해 동적인 과정으로 우주/지구/생명이 창조되었음을 알려준다. 초자연적이고 즉각적인 창조의 방식이 아니라, 자연법칙을 사용한 동적이고 긴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이 창조세계를 창조하고 섭리하신다는 의미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부분에서 어려움을 느낀다. 즉 창조주가 어떻게 창조하고 역사하는지, 창조주의 행위에 관해서도 새로운 이해가 요구되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 가장 큰 어려움과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점이 바로 우연성이다. 우주가 우연한 과정을 통해 진화했고 생명의 세계가 우연한 과정을 통해 다양한 종들을 만들어 내었다면, 이러한 자연세계는 하나님의 창조를 부정하는 것일까?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는 과학의 우연성과 반대되는 개념이며, 그렇기 때문에 과학이 자연현상을 우연으로 설명해 내면 그것은 하나님의 창조와는 양립할 수 없다고 오해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많다. 가령, 창조과학자들은 우연성을 담고 있는 과학, 특히 생물진화과학을 반대한다. 인간의 기원을 우연의 과정으로 설명하고 우주와 생명의 역사를 우연성으로 설명하는 과학은 무신론이며 그런 과학을 수용하는 그리스도인들은 무신론자보다 더 나쁘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런 오해와 잘못된 주장은 과학과 신학이 서로 다른 범주에 속한다는 점을 이해하지 못하고 과학과 신학을 같은 위상에서 비교하기 때문에 생기는 안타까운 결과이다. 특히 과학의 설명 방식에 대한 오해에서 이런 주장들이 출발한다.
@AlexAntropov86, pixabay
우연성이란 무엇일까? 일상적인 의미의 우연은 뭔가 계획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도하지 않은 사건이 발생할 때 사용한다. 미리 계획하지 않았지만 지하철에서 친구를 맞닥뜨리면 우리는 우연이라고 표현한다. 하지만 이런 일상적 의미와 달리 과학에서 사용하는 우연성은 어떤 목적이나 계획을 아예 취급하지 않는다. 과학은 형이상학적인 목적과 의도 혹은 방향을 다루지 않기 때문이다. 소위 자연주의적 방법론이라고 부르는 과학의 방법론은 자연현상의 인과관계를 자연세계 내부의 원인과 결과로 설명할 뿐이며 그 자연현상 뒤에 신의 의도나 계획이 있는지 혹은 신이 존재하지 않으며 목적과 방향성 없이 그런 현상이 일어났는지를 다루지 못한다. 목적과 방향, 의도 이런 설명은 과학의 범주가 아니라 형이상학, 철학 혹은 신학의 범주이기 때문이다.
물론 무신론을 주장하는 일부 과학자들은 자연현상을 과학으로 설명할 수 있다면 신이 배제’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과학은 자연현상을 다룰 뿐, 어떤 신적 존재나 지적인 존재가 의도와 목적을 가지고 자연현상을 섭리하고 역사하는지 혹은 그렇지 않은 지 변별할 수 없다. 무신론자인 자크 모노와 리처드 도킨스는 생물의 진화과정을 우연성으로 설명하면서 자연세계에 목적성이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만일 신이 창조했다면 그 신은 눈먼 시계공과 같았을 거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들의 주장은 신의 섭리와 역사를 자연현상의 한 원인처럼 끌어내린 범주의 오류다. 과학과 과학주의 혹은 무신론을 구별해야 한다.
과학은 목적과 의도를 다루지 않는 대신 모든 현상을 필연과 우연으로 설명한다. 가령, 주사위를 던져서 3이 나오면 이 현상은 필연일까, 우연일까? 필연은 아니다. 왜냐하면 다른 숫자가 나올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러 가능성 중에 한가지 가능성이 실현되면 과학은 우연이라고 설명한다. 가령, 전자가 왼쪽으로 갈 수도 있고 오른쪽으로 갈 수도 있는데, 실험을 해보니 왼쪽으로 갔다면 과학은 우연이라고 말한다. 과학적 설명은 필연과 우연 밖에 없다. 그리고 그 필연과 우연은 신학에서 말하는 신의 목적과 의도, 혹은 섭리와 반대되는 개념이 아니다. 과학적 설명으로는 우연이지만, 신학적 설명으로는 하나님의 계획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가령, 성서에는 이런 사건들이 많이 등장한다. 사도행전에는 가룟 유다를 대신할 제자를 뽑을 때 제비뽑기를 사용하는 장면이 나온다. 다시스로 도망가는 배에 폭풍이 일자, 선원들은 제비뽑기를 통해 요나가 그 원인임을 알아낸다. 이런 사건들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제비뽑기로 한 사람이 선정되면 과학은 우연이라고 설명한다. 반드시 그 사람이 뽑혀야 하는 필연이 아니기 때문에 우연이다. 하지만 과학적으로 우연인 사건을 통해 하나님은 정확히 자신의 뜻을 보여주시고 하나님의 계획을 드러내신다. 잠언 16장 33절은 이렇게 말한다. “제비는 사람이 뽑으나 모든 일을 작정하기는 여호와께 있느니라.”
룻과 보아스의 만남도 흥미롭다. 룻은 보아스를 만나서 부부가 되고 결국 보아스는 룻의 기업을 무르게 된다. 그런데 룻기 2장 3절은 이렇게 증언한다. “룻이 가서 베는 자를 따라 밭에서 이삭을 줍는데 우연히 엘리멜렉의 친족 보아스에게 속한 밭에 이르렀더라” 룻이 보아스를 만나게 된 것은 우연일까? 아니면 하나님의 섭리일까? 과학적 설명은 우연이다. 성서도 그렇게 증언한다. 룻은 ‘우연히’ 보아스의 밭에서 이삭을 줍게 되었다고. 하지만 신학적 설명은 하나님의 계획이다. 우리는 그 우연한 이삭줍기 과정을 통해서 룻이 보아스를 만나도록 하나님이 의도하시고 계획하셨다고 믿는다.
@spalla67, pixabay
우주와 생물의 진화는 어떨까? 마찬가지다. 생물의 진화는 다양한 가능성을 가진 우연의 과정이다. DNA의 변이는 한 방향으로 미리 결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무작위적으로 발생한다. 다양한 생물들이 현재의 모습으로 진화한 과정을 과학은 우연으로 설명한다. 하지만 이 설명은 신의 계획과 섭리가 있었는지 혹은 없었는지를 묻는 말에 대한 답이 아니다. 과학은 생물들이 다른 방식으로 진화했을 가능성이 있었다고 말할 뿐이다. 그것이 과학이 말하는 우연의 의미다. 하지만 신학적으로는 왜 그 우연이 발생했는지 묻는다면 어떨까? 여러 가지 가능성 중에 왜 그 가능성이 실현되었을지 묻는 물음에 과학은 답할 수 없다. 과학은 그저 필연이 아니라고만 말할 뿐이다. 하지만 신학은 그 우연이 바로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이라고 설명한다. ‘왜 하필 룻이 보아스의 밭에 갔을까’라고 물으면 과학은 우연이라고 설명하지만, 신학은 그 우연을 하나님이 사용하셨다고 설명한다. 과학의 우연성은 하나님의 섭리와 배치되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이 실현되는 과정이다.
무신론자들과 다르게 신학자들은 자연세계에 담긴 우연성이 오히려 신의 목적과 의도를 담은 것이라고 말한다. 독일의 조직신학자 판넨베르크는 창조의 과정을 기계적으로 제한하는 그런 신관을 깨트리는데 우연성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지적한다. 우연이 없는 필연적 과정 만을 다루는 기계론적 자연관은 하나님을 기껏해야 이신론의 신으로밖에 만들지 못한다. 이신론의 신은 과거에 자연질서를 창조했지만, 그 이후에는 아무 역할도 못하고 안드로메다로 휴가를 떠나 있는 셈이다. 자연의 역사 과정에서 계속 창조하는 신이 아니라 그저 만들어 놓고 아무런 일도 하지 않는 신의 부재가 바로 이신론의 기계론적 창조관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기계론적인 자연관과 더불어 이신론적인 신관을 깨트리는 역할을 바로 우연성이 해주었다는 것이 판넨베르크의 관점이다. 그래서 그는 진화생물학에 반대하는 반-진화론이 신학과 과학의 관계에서 일어난 가장 심각한 오류라고 지적한다.
미국의 과학신학자인 아서 피콕은 우연은 모든 가능한 탐색 대상들을 훑고 지나가는 신의 레이더 탐지기라고 표현했다. 우연성은 새로움을 만들어내는 엔진이며 다양성과 생명력을 제공한다. 그래서 기계적이고 새로운 가능성이 없는 창조세계가 아니라, 놀랍고 풍성한 새로움을 만들어내는 창조세계로 만든다. 창조세계는 과학으로는 우연이라고밖에 설명할 수 없지만 신학으로는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와 역사를 통해 하나님의 계획이 실현되는 영광스런 세계다. 우연을 통해 섭리하시는 창조주 하나님께 우리는 마땅히 찬양과 경배를 돌려 드려야 한다.